일하기 싫을때 하는 일

by 게으른 곰

나는 차분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맞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영화 세 편 정도를 볼 수 있다. 사실, 차분한 사람과 영화 세 편 사이에 과연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용한 성격이라는 건 확실하다. 그런데 요즘 나는 심히 분주하고 정신없는 사람이 되었다.


10개월 만에 돌아온 한국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남편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모습은 물론이고 성격도 그대로라 혼자 살았던 집은 깨끗한데 어딘가 지저분했다. 남편은 정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알아챘다. 정돈되어 있지만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구석엔 먼지가 쌓여있었고 선반 위엔 물건이 가지런한 듯 정리가 안되어있었다. 글을 써야 하는데, 이렇게 지저분한 환경에서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자꾸 신경이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로 향한다. 하나씩 정리를 시작했다. 내 마음에 들 때까지 정리를 마쳤고 생각했고 마음이 어느 정도 편안해졌다. 내 일을 시작했다. 나는 요즘 거의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억지로 쓴다. 한 해를 열심히 놀았더니 매일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이 크진 않았다. 무언가 매일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주말은 바빠서 글을 쓰지 못했지만 평일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글을 쓴 지 딱 2주가 됐다. 무언가 해내고 있다는 성취감이 좋다.


매일 잘 써지면 좋겠지만 영감이라는 것은 항상 찾아오는 게 아니다. 어느 날은 세줄이상 글을 쓸 수가 없다. 멍하니 화면만 30분 이상 바라보다가 다른 글을 시작한다. 그 글 역시 5줄 정도 쓰고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일어나 커피를 한잔 내린다. 고소한 커피 향이 퍼진다. 커피를 여유 있게 마시고 다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조급한 나는 커피 잔을 노트북 옆에 내려놓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내가 쓴 글들을 읽어본다. 여전히 막막하다. 나의 모든 경험과 지식과 감정을 아무리 뒤져도 더 이상 써내려 갈 수 없다. 그때 피아노 위 화분이 눈에 들어온다. 화분이 말랐다. 옆에 있는 화분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당연히 화초에 큰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물통을 받고 화분에 물을 준다. 우리 집에 있는 총 5개의 화분에 모두 물을 줬다. 한 개는 큰 화분이라 물통에 물을 두 번 더 받아와야 했다. 기분이 좋다. 화초가 싱그러워진 것 같은 느낌이다.

다시 눈을 노트북으로 옮긴다. 아! 앞줄에 썼던 내용에 붙일만한 내용이 생각났다. 역시 사람은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을 다섯 줄 추가해서 쓴다. 앞의 내용과 잘 맞아떨어진다. 글쓰는 재미가 다시 느껴진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게 얼마나 큰 재산이 되는지 어른이 돼서야 알게 되었다. 그때의 감정과 기억은 여전히 나의 삶 속에 녹아있다.

다시 글을 막혔다. 천장을 본다. 무늬가 없는 벽지다. 벽지와 벽지 사이의 이음새를 찾는다. 이음새를 따라가다 보니 다른 벽 쪽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그 벽을 따라 내려오니 꽃병에 꽂힌 마른 꽃들이 보인다. 2주 전 출판사에서 받은 꽃다발이다. 해외에 있을 때 책이 출간되어 이번에 축하를 받았다. 예쁘게 꽃병에 꽂아뒀는데 요 며칠 사람을 만나느라 정신없이 보내느라 물을 못 갈아줬다. 물을 갈아줬어도 시들어질 시간이 흘렀다. 다시 일어난다. 물을 버리고 꽃도 쓰레기통행이다.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화분이 좋긴 한데 잘 관리할 자신이 없다. 게다가 남편에 맡기고 다시 떠나야 하는 상황이라 새로운 화분을 들일 엄두를 내지 못한다. 꽃다발은 다른 기쁨을 주지만 짧은 시간 후에 마른 꽃을 버릴 때면 늘 마음이 좋지 않다. 너무 짧은 시간 동안 가장 화려하게 살다 죽은 느낌이 들어 그런가 보다. 꽃병을 보관하고 다시 책상에 앉는다. 여전히 글은 그대로다.


손톱 옆에 삐쭉 튀어나온 가시가 눈에 들어온다. 습관으로 생긴 오른쪽 손가락 굳은살을 문질러본다. 노트북 주변 책상 위가 너무 지저분하다. 아침 먹고 미뤄둔 설거지가 신경 쓰인다. 아까 먹고 바로 했어야 했는데, 글을 얼른 쓰고 싶었다. 더 시간이 지나면 그릇에 뭍은 밥풀이 딱딱해져 설거지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지금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엉덩이를 또 의자에서 뗀다.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밥풀이 반쯤 굳어버려 수세미로 힘줘 박박 문질러 겨우 밥풀을 떼냈다. 지금 설거지하길 참 잘했다 생각이 든다.


다시 자리로 와 앉았는데, 글은 그대로고나도 그대로다. 더 이상 쓸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다. 노트북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들고 이것저것 검색을 한다. 유머글도 보고 카페도 간다. 다른 사람의 글도 보고 사려고 했던 장갑도 찾아본다. 그러다 아주 잠깐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정확히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구름이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울창한 숲 속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요즘 자주 생각하는 그 장소에 내가 있었다. 바람이 살짝살짝 불었고 햇살은 따뜻했다.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잠이 깼다. 몽롱한 기분으로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기분 좋은 느낌을 유지하며 글을 써 내려간다. 내용은 다르지만 쓰려고 하는 감정은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막혔던 글을 20줄 정도 더 써 내려갔다. 늘 그렇듯이 마무리는 급하게 맺는다. 글을 쓸 때마다 끝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다짐이나 교훈, 느낌으로 마무리하긴 하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언제 날을 잡아 퇴고를 해야할것 같다.


후련한 마음으로 노트북을 닫고 주변을 둘러본다. 책상 위는 깨끗해졌고, 화초들도 싱그럽다. 설거지도 다 했다. 마시던 커피잔만 남았다. 정돈된 집이 안정된 기분을 들게 했다. 글을 쓰면서 여러 가지 좋은 점들이 많은데, 글을 한편 쓰면 집이 깨끗해진다. 아주 큰 장점이다. 우리 모두 글을 써보자.


특히 청소가 싫은 사람들에겐 더 좋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청소를 하고 싶어 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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