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키위, Nick.

by 게으른 곰

뉴질랜드에 도착한 다음 날, 닉을 만났다. 주차장을 네 집이 같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한 번씩은 만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나는 집을 보지 않고 계약을 했다. 한국에서 미리 대행을 통해 집을 구했기 때문에 사진으로만 본 집이다. 사진으로 본 집과 직접 가서 본 집은 똑같았지만 어딘가 달랐다. 마당 사용도 그중 하나다. 그래서 닉을 만났을 때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때만 해도 나는 영어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닉은 큰 웃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잘 웃었다. 금발이었고 왼쪽 팔 엔 문신이 가득했다. 190은 훌쩍 넘어 보이는 장신이었다. 딱 서양인이라는 느낌이 드는 청년이었다. 처음부터 난 그가 좋았다. 큰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먼저 하더니 악수를 청하면서, 이사 왔냐고 묻고 자기소개를 했다. 옆에 조용히 서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자신의 파트너라며 그녀도 소개했다. 여자는 조용히 인사를 했다. 낯을 가리는 모양이다. 나도 반갑게 악수를 하며 내 이름과 한국에서 왔다고 짧은 인사를 전했다. 그때 그는 분명히 내 이름을 기억 못 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외국인은 내 이름을 발음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영어로 바꾼 내 이름은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다. '준'이라던지, '수지'같이 영어로 바꿔도 찰떡같이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이름이다. 영어로 된 이름을 하나 만들까 하다가 내 이름을 왜 내 이름으로 사용 못하는데!라는 괜한 고집이 들어 그냥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터라 계속 사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은 내 이름을 듣고 머리 위에 물음표가 뜨는 게 느껴진다. 그러다 어느 키위(뉴질랜드 백인을 부르는 애칭)가 내 이름을 잘못 부르는 바람에 딱 좋은 내 이름+영어이름이 만들어졌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번에 풀어보겠다.


혼자 이름에 대한 고민을 한 계기가 있었는데, 닉과 내가 처음 소개를 나눴던 그날, 닉의 이름은 바로 기억이 되었는데 닉의 파트너라고 소개받은 여성의 이름이 집에 와서도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이다. 헤어진 지 1분이 채 안된 시간이 흐른 뒤다. 어려운 이름도 아니었고 길지도 않았다. 그런데 뒤돌아서자마자 기억이 안나는 이유는 내가 영어 이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기억이 안된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런 일은 그 이 후로도 계속 일어났는데, 누군가를 만나 이름을 들었는데 기억을 못 한다던지, 어디를 가려고 기억한 거리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던지, 음식점이나 가게 이름도 금세 까먹고 다시 찾아봐야 했다. 한국어로 평생을 무언가를 기억하던 나의 뇌는 영어로 된 대명사를 기억하기에 아직 준비가 안되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아직도 영어로 된 이름이 어렵다. 영어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클로이였다.


다시 닉의 이야기로 돌아와, 처음 인사를 한 다음날 마당을 지나는 닉이 보여 밖으로 나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대해 질문을 했다. 처음 다른 나라에서 살게 된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가 다 의문이었다. 내 집 주차장엔 커다란 쓰레기통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파란색이고 하나는 초록색이다. 뚜껑은 모두 노란색이다. 그런데 두 쓰레기통 모두에 recycling이라고 쓰여있는 것이다. 하나가 재활용 쓰레기통이면 다른 하나는 분명히 일반 쓰레기통이어야 하는데 내가 아는 recycle이라는 단어는 '재활용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혼동이 왔다. 아직도 이 문구의 정체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파란색이 일반 쓰레기통, 초록색이 재활용 쓰레기통이었다. 닉은 쓰레기를 버리는 요일, 일반쓰레기는 매주, 재활용 쓰레기는 격주로 수거해 가며 일반 쓰레기는 마트에서 rubbish tag을 사서 부착하고 내놔야 수거해 간다는 것, 밤에 내다 놓으면 다음날 아침에 수거해 간다, 월요일이 공휴일인 주에는 하루씩 밀려서 내놔야 한다. 라는 설명을 원어민 영어로 매우 빠른 속도로 나에게 설명했다. 설명을 들으며 점점 멍해지는 나는 그때 또 깨달았다. 내가 영어로 질문을 할 수 있는 게 다가 아니었다. 질문을 했으면 답변이 올 것이고 그 답변을 내가 알아들어야 한다. 닉의 길고 빠른 설명 중 나는 Monday night을 캐치했고 어떤 게 일반 쓰레기통인지는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통은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닉은 내 표정을 보고 이해했어?라고 되물었고 나는 음.. 이라고밖에 대답하지 못했다. 상냥한 닉은 살다 보면 알게 될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집으로 들어와 구글을 뒤졌다. 어떻게든 쓰레기는 버려야 한다. 구글은 나에게 친절히 뉴질랜드에서 쓰레기 버리는 방법을 알려줬다. 지역마다 회수일이 다른데 내가 사는 지역은 월요일 밤에 내놓으면 된다. 그러다 음식물은 일반 쓰레기에 같이 버리면 된다고 누군가 써놓은 글을 읽었다. '... 이게 맞다고?' 처음 음식물 쓰레기를 일반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든 생각이다. 적응 안 되는 음식물 쓰레기 배출을 몇 달쯤 했을까, 드디어 뉴질랜드에도 음식물 쓰레기 수거가 시작됐다. 이제 집에 쓰레기통이 3개가 되었다.


닉은 언제나 밝은 사람이었다. 그 밝음이 나에게도 전해져 같이 밝은 사람이 되는 듯했다. 남편 없이 혼자 생활한 나는 문득문득 차분하고 우울해지곤 했는데, 닉을 만나는 날은 그의 밝은 에너지에 나도 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늦은 오후, 집 앞에서 닉을 만났는데, 그가 평소보다 더 흥분하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둘째 성별이 오늘 나왔는데, 딸 이래!!"


라고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의 눈은 바쁘게 위아래 옆으로 움직였다. 클로이가 임신한 줄 몰랐다. 처음 인사를 나누고 클로이랑은 자주 마주치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 클로이는 임신 초기였던 것 같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그렇다. 9월 말이 예정일이라고 한다. 닉과 클로이는 아들이 하나 있다.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운 남자 아이다. 몇 번 마주쳐 인사를 건네면 수줍어하면서 인사를 한다. 우리 집 옆을 지나갈 때마다 들리는 귀여운 소리에 열렬한 행복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사랑스러운 아기가 또 태어난다니, 게다가 딸이라니. 내 일처럼 기뻤다.


"정말이야?? 축하해!!!"


라는 말을 하자 닉은 나를 덥석 안는다. 외국인과 처음 외국식 인사를 한 순간이다. 닉은 매우 행복해했고 나도 같이 행복해졌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닉도 딸 바보가 되었다.


평온한 뉴질랜드 삶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집에 도둑이 들었다. 두 번 도둑을 경험했는데, 한 번은 물건을 도난당했고 한 번은 도둑과 근황을 주고받았다.

첫째 친구가 자전거로 통학을 하는데, 등굣길에 넘어져 무릎을 다쳐 자전거를 우리 집에 맡기게 되었다. 우리 집은 학교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창고에 보관하고 친구는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동안 자전거에 대해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큰애가 친구 자전거의 안위를 궁금해하며 창고에 다녀오더니


"엄마, 자전거가 없어졌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창고에 갔더니 난장판이 돼있었다. 내 짐은 유일하게 자전거 하나였다. 창고 안쪽은 집주인이 물건을 수납해 뒀었다. 그 물건들이 다 꺼내져 있고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다. 집주인 물건 중 뭐가 없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자전거가 없어졌다. 부동산에 연락해 집주인에게 이 사실을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첫째 친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유학생은 모두 보험 가입이 필수기 때문에 물질적인 손해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걱정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살면서 도둑을 처음 경험했다. 누군가 낯선 사람이 내 물건을 손대는 일이 내 집에서 일어난 일이 소름 끼쳤다. 무서웠다. 덜컥 겁이 났다. 남편도 없고 영어로 소통이 원활하지 않는데 큰일이 생긴 것 같았다. 닉을 찾아갔다. 상황을 설명하니 닉과 클로이는 먼저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닉은 내 창고로 가 유리창으로 된 벽 부분을 가리키며 여기로 자전거를 보고 들어왔을 것이라고 했다. 밖에서 자전거가 훤히 보였을 것이다.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뉴질랜드는 도둑이 많다고 한다. 차 안에 동전이 보이면 차유리를 깨고 동전을 가져간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났다. 동전보다 깨진 차 유리 수리비용이 훨씬 더 많이 나갈 것이다. 나는 자전거를 창고에 두면서 한국 정서로 생각한 것 같다. 누군가 내 물건을 훔쳐가지 않을 거라는 믿음 같은 거 말이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서로 간의 합의된 믿음은 한국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창고 열쇠도 없다. 잠가놓지도 않았다. 위에 언급한 내용과 같은 이유다. 부동산에서 창고 열쇠가 없지만 문만 잘 닫으면 된다고 말한 게 생각났다. 만약 열쇠로 문을 잠갔다면 유리로 된 창문을 깨고 들어왔을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깨진 유리를 치우고 다시 유리를 끼워 넣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았다.

닉은 유리로 된 벽을 밖에서 보이지 않게 박스로 막았다. 이제 창고 안이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해 주겠다고 했다. 내가 "문 손잡이를 지문 채취를 할 수도 있으니 만지지 않았어!"라고 말하니 닉은 피식 웃더니 덥석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연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말했다. "경찰에 신고하면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라고 내가 다시 물었다. 닉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 갑자기 허무해졌다.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괜한 수고로움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냥 보험사에 연락해 분실된 자전거의 보상이나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도둑이야기를 지나 근황으로 대화 주제가 옮겨졌고 한참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보험에 가입돼 있냐고 해 그렇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했다. 닉은 여러 가지 말로 나를 위로했고 그런 그가 많이 고마웠다.

첫째 친구가 보험으로 보상받지 않겠다고 해서 자전거는 그대로 사라졌고, 집주인의 물건은 아직도 어지럽혀진 그 상태다. 집주인은 값나가는 물건이 없는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뉴질랜드는 물건을 사고 영수증을 꼭 챙겨둔다고 한다. 좀도둑이 많은 나라에서는 꼭 필요한 지침이다.


두 번째 도둑은 우리 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매우 당황해하며 사과를 하고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몇 초 동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위해 다시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고 그를 따라 나갔다. 왜 남의 집 문을 노크도 없이 여냐, 너 누구냐, 왜 여기에 왔냐 등의 질문을 했고 그는 우리 옆집에 숙박을 하기 위해 왔는데 열쇠가 없어서 열쇠를 찾는 중이라고 했다. "네 집 문을 연건 정말 미안해. 실수야."라는 말을 뒤에 붙였다. 나는 순간 에어비엔비 같은 숙박업을 생각했다. 옆집이 에어비엔비로 방을 내놨을 수도 있다. 그렇게 오해가 풀렸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통성명을 시작했고 악수도 했고 농담도 했다. 내 이름을 말해주면서 너희들은 내 이름을 잘 발음하지 못해. 했더니 그가 내 이름을 너무 정확하게 말했다. 네가 지금까지 만난 키위들 중에 제일 발음이 좋다.라고 칭찬도 했다. 한참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우리 집에 와. 이번에는 그냥 문 열지 말고 노크를 꼭 해!"라고 농담을 던지며 말이다.


갑자기 밖에 소란스럽다. 커튼을 제치고 보니 경찰이 여럿 와있다.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나도 나갔다. 닉이 왔다. 회사에 있을 시간이다. 닉은 나를 보고 괜찮냐고 묻는다. 나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돼 또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으니 닉이 설명하기를, 그 남자가 도둑이란다. 이건 또 뭔 소린가 했더니 옆 집을 털러 온 도둑이 문을 못 따서 밖에서 배회하다가 우리 집 문을 열었고 안에 사람이 있으니 당황하며 다시 나갔는데 내가 쫓아나가 그와 즐겁게 대화를 나눈 것이다. 닉은 그 남자 가방에서 고기가 나왔다고 했다. 고기는 또 뭔 소리야? 하고 있으니 도둑이 집을 털 때 개가 있으면 그 고기를 개에게 던져준다고 설명했다. 소름이 돋았다. 대체 난 왜 이렇게 쉬운 사람이란 말인가. 그와 나의 대화를 클로이가 집안에서 지켜보다가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이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 클로이는 내가 왜 저러고 있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나는 경찰과 조서를 작성했다. 내 신상정보와 나의 진술을 경찰이 기록했다. 그가 우리 집 문을 열었다라고 하니 안으로 들어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냐고 되물었다. 그렇지는 않고 당황하며 나갔다고 한 뒤 그와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말하면서 상황을 다시 생각해 봤다.


그는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뉴질랜드 사람은 가끔 신발을 안 신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바다가 가까이에 있고 깨끗한 거리에 자연 친화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살다 보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다. 어린아이들이 신발을 신고 있지 않는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다. 거리나 마트에서 맨발인 아이들을 많이 만난다. 그 남자도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옷차림이 조금 허름하긴 했다. 계단에 옷가지를 늘어놓고 그 앞에서 나와 대화를 나눴다. 행색이 좋진 않았지만 물건 재활용이 발달한 나라인 뉴질랜드에 살다 보면 이것도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지금 생각하면 내가 너무 의심을 안 했나 싶기도 하다. 사람에 대한 편견을 안 가지려고 하는 성향도 한몫했을 것 같다.


도둑과 대화를 나누다니.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새로운 일들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좋기도 한데 나이가 들수록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닉은 잠깐 우리 집에 들어가도 되겠냐고 묻고 우리 집에서 나에게 이런저런 정리된 상황을 이야기를 해줬다. 그는 경찰에 잡혀갔고 나는 큰 애와 치킨을 사러 나갔다. 도저히 밥을 할 마음이 아니다. 그날밤은 선잠을 잤다. 어디서 주워 들었다. 뉴질랜드는 도둑은 많은데 강도는 없는 나라라고. 그래도 밤이 되니 무서웠다. 애들도 불안할 거라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침대에 누웠다. 문단속을 더 열심히 했다.


닉은 지금도 좋은 이웃이다. 기타를 배우는 첫째랑 우리 집에서 같이 기타도 치고 내가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Nirvana'의 'Smells like teen spirits'를 연주하며 공감대를 나눴다. 무성한 잡초도 베어줬고 이번에 한국에 올 때 미처 배달되지 않은 택배도 보관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왔다.

그런데 닉이 내년 2월에 이사를 간다. 날 떠나지 말라고 농담을 던졌고 그도 아쉬워했다. 둘째가 태어나고 식구가 늘어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했다. 마침 나는 3월에 이사를 가야 했고 닉이 이사를 가면 그의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학교와 가까웠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나는 이웃이 모여 사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부동산 시스템을 잠깐 얘기하자면, 집주인이 집을 내놓고 세입자가 나타나면 거래가 바로 성립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뉴질랜드는 집 매물이 나오면 공개 오픈 기간을 두고 집을 보러 온 사람들 중 입주를 원하는 사람이 지원서를 먼저 쓴다. 그렇게 모인 지원서가 집주인에게 전달되고 집주인은 그중 제일 안정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고 집을 깨끗하게 사용할 것 같은 사람을 골라 계약을 한다. 이사를 가야 할 날짜까지 집을 못 구해, 정확히는 집주인에게 선택을 받지 못해 호텔로 들어갔다는 사람 얘기, 지원서를 수십 개 냈는데도 선택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학교와 멀리 떨어진 곳에 집을 구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주세를 올려서 들어가는 사람도 봤다.

닉의 집 뒷마당에 잔디 정원이 있어 관리를 물어보니 집주인이 관리할 수 있게 사람을 보내준다고 했다. 닉의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할 이유가 또 생겼다. 계약 기간이 6주나 겹쳐져 이중으로 렌트비를 지불해야 했지만 여러가지를 고려했을 때 괜찮은 조건이다. 제일 중요한 건 이사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


닉은 부동산 매니저에게 나를 미리 소개해줬다. 지원서에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 2명을 적어야 하는데 닉은 흔쾌히 자신의 이름을 쓰라며, 현재 세입자라 너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응원해 줬다. 공개로 집을 내놓기 전에 나는 집주인과 거래를 했고 계약을 했다. 이사 갈 집을 3달 전에 미리 구해놨다. 대게는 이사 가기 한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집을 알아보고 지원서를 쓰고 거래를 한다. 매우 정신없고 스트레스받고 힘든 시간이 생략됐다. 불투명함에서 벗어났다. 닉에게 계약서를 완료하고 소식을 전하니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그리고 난 한국으로 왔고 다시 뉴질랜드로 가면 닉은 곧 이사를 간다. 이 사실이 벌써 슬프다. 내가 영어를 조금 더 잘했더라면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됐을 것이다. 저녁 식사에도 초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을 수도 있었겠지. 영어를 못해도 자신감만 조금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올해 나는 영어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조금 의기소침해 있었다. 영어 공부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했어야 했다.


뉴질랜드로 돌아가면 닉과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 닉의 이야기를 언젠가 자세히 글로 써보고 싶다. 그가 나에게 베푼 개인의 친절은 뉴질랜드의 이미지로 나에게 기억될 것이다.


뉴질랜드는 사람들이 친절하고 자연이 아름다운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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