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1. 부모와 같은 항렬의 여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2. 남자가 같은 항렬의 형뻘이 되는 남자의 아내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3. 남남끼리에서 결혼한 여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
4. 형의 아내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5. 위 처남의 아내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출처: 네이버 사전-
아줌마의 사전적 의미는 친족 호칭이었으나 요즘은 그 의미가 확대되어 어느정도 나이가 있는 여자를 부를 때 많이 쓰인다. 그런데 왠지 '아줌마'라는 단어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큰 것 같다. 누군가 나에게 '아줌마'라고 불렀을 때 기분좋게 돌아서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아줌마는 무례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하철에서 자리가 생기면 저 멀리서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같은 이미지 말이다. 시장에서 물건 값을 깎는 사람도 아줌마고, 창피함을 무릎쓰고 무료 사은품 하나 더 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아줌마다. '아줌마'라는 단어에는 '억척스럽고 억지스럽고 뻔뻔하고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작년에는 아줌마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다. 이 무시무시한 단어는 그만큼 듣기 싫은 호칭이 되어버렸다. 내가 아줌마로 불리는 건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닌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사전적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아줌마'는 원래 '아주머니'의 줄임말로 '아주머니'를 낮추어 말하는 단어다. '아주머니'의 뜻은 부모와 같은 항렬의 여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다. 다른 의미를 봐도 대부분 결혼한 여자에게 주어지는 호칭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부터 아줌마는 젊은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젊을 땐 억척스럽지 않다. 억지도 부리지 않는다. 공짜를 좋아하긴 해도 그것을 위해 창피함을 무릎쓰진 않는다. 공짜인 물건보다 나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 젊음은 공짜보다 더 우월한 것이며 의미 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나의 가치는 조금씩 바뀌게 된다. 육아를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고 힘든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제일 중요했던 나 자신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일이다. 나를 중심으로 돌던 세상은 이제 나의 아이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이전의 나는 죽었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아이를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용기를 선물 받았다.
그 용기 때문에 변해가는 것이다. 아줌마로.
어느 날 문득, '아줌마'라는 단어속에 다른 의미가 느껴졌다. 평소에 나도 아주마라는 소리가 그리 듣기 좋은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말 뒤엔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숨어있었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어렵고 힘든 일들이 계속 생긴다. 지금껏 살면서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살 수 없는건 당연하고, 그 어느때보다 스스로 인내하고 참으며 바른 길을 가려고 애쓴다. 나의 욕구를 누르고 어린 자식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 다시 공부하고 책을 읽고 일찍 잠든다. 처음엔 아이를 재우고 몰래 일어나 억누른 욕구를 채우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그 계획을 실천하기엔 나의 체력은 이미 방전되어 버렸다.
아이 입에 맛있는 음식 하나 더 넣어주고 싶어 품질 좋고 저렴한 물건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뒤도 안돌아보고 그곳으로 향하는게 엄마다. 좋은 물건을 싸게 구입하면 두가지가 좋은 일이다. 아이 때문에 남에게 굽신거린적도 있고 잠옷에 슬리퍼 차림으로 열나는 아이를 남편과 들쳐업고 병원으로 내달린 적도 있다. 남의 시선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얼굴이 벌개져 끙끙 거리며 정신을 못차리는 어린 자식이 걱정될 뿐이다. 아이와 활동하면서 신발은 운동화로 변했고 옷차림도 활동하기 편한 펑퍼짐한 옷으로 바뀐다. 어릴 땐 옷에 이물질이 묻는게 매우 흔한 일이라 비싼 옷은 입을 일도 없다. 그렇게 원피스나 정장은 몇 십 년 째 장농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햇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유행이 지나 버려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자식을 키우는 일은 체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라 의자만 보면 앉고 싶은 시절이 있었다. 이동거리가 길어지면 그 소망은 더 간절해진다. 양손엔 아이 짐이 가득하다. 피곤한 아이가 잠이 들면 아이까지 들처 업는다. 이동 중 아이가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면 아무 상가나 들어가 양해를 구하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었고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도 많았다. 나는 원래 내성적이라 모르는 사람에겐 말을 잘 걸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나의 아이는 오롯이 내가 혼자 키운게 아니다. 아줌마가 되가면서 만난 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키웠다.
그렇게 아줌마가 되어 간다. 시장에서 고등어 가격을 깎아 생활비를 아껴 고생하는 남편의 어깨짐을 줄이고 내 배가 곯아도 자식 입에 고기 한점 더 넣어주는 엄마가 바로 아줌마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인생을 살다보니 세상을 향한 이해의 폭이 넓어져 스스로를 예의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겪어보니 별일 아니더라' 하는 상황에서 젊은이는 예의없고 무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아직 아줌마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것은 당연하다. 물론 아줌마가 되었다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지나온 시간속에서 그들이 배우고 터득한 것을 타인에게 베푸는 사람이 된다. 사실 대다수의 엄마들이 이 쪽에 속할 것이다. 내 아이 입에 고기 한 점 넣어준 사람들은 다른 집 자식에게도 고기를 내줄 수 있다. 아이가 집에 친구를 데리고 왔을 때 따뜻한 밥 한공기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엄마는 없을 것이다. 자식을 키우면서 품이 커진 엄마는 또래 아이들이 모두 내 자식같다. 기쁜 일엔 같이 기뻐할 수 있고 슬픈일엔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는, 바로 우리들의 엄마인 것이다.
이렇듯 아줌마의 부정적 이미지를 변명해보자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가 적합하다. 여전히 무례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 같겠지만 그들도 젊었을 땐 몇 천원 아끼자고 창피를 무릅쓰지 않았다. 그런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어쩌다보니 그렇게 살게 된것이다. 그들의 자식은 다 커서 젊음을 누리고 있고, 다 큰 자식이 곁을 떠난 우리는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그래,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