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론은 남편이 보고 싶은 것인가?
29살에 나는 엄마가 됐다. 그리고 30살에 또 한 번 엄마가 됐다.
딸이 둘이다. 큰애가 1월생이라 둘은 20개월 차이지만 연년생이다. 연년생은 키우기 어렵다는 말을 주변에서 하도 많이 들어서였을까? 육아는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경험이었다.
아이들은 금세 자랐다. 콩나물이 물 먹고 쑥쑥 자라듯 내 아이들도 쑥쑥 컸다. 벌써, 가끔은 기특한 생각도 할 줄 아는 청소년이 되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의 양과 질이 높아지면서 아직은 설익은 생각이지만 본인의 의견을 주장할 수도 있게 되었고 간단한 요리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쫓아다니며 준비물을 챙겨주지 않아도 되고 매 끼니를 오롯이 내가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만의 시간이 늘어났고 바빴던 삶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나는 아이들이 태어난 후에도 내 일을 꾸준히 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뭔가 배우러 다닐 때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힘들었고 청소를 해도 금세 어지러워지는 집에 하루종일 있는 게 답답했다. 나는 하루종일 애들을 먹이고 집을 치웠다. 그래서 밖에 나가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배우는 게 무척 즐거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행복했다. 육아를 통해 느낄 수 없었던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계속 배웠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배우지 않으면 종일 아이들과 씨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고 나는 나의 일을 하니 일석이조라고 계속 되뇌었다. 3살에 처음 어린이 집을 보냈었는데, 그땐 너무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꽤 오랫동안 불편했다. 사회를 처음 겪는 아이는 며칠 동안 나와 떨어질 때마다 울었고 그것을 지켜보는 건 꽤나 고역이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아이를 들여보내고 돌아선 나는 '엄마'의 자격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엄마 자격의 정의를 하나씩 곱씹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걷다 보면 내가 다니던 학원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나를 찾는 시간이다. 이번엔 몇 시간 동안 '나'의 정의를 찾는다. 나의 꿈과 하고 싶은 일, 나의 미래의 모습을 그린다. 그렇게 나와 한참을 씨름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조금 가벼웠던 것 같다.
그렇게 10년 정도, 나는 아이들을 계속 어딘가에 맡기며 내 꿈을 좇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잘 자라줬다. 나는 더디지만 내 일에서 성과를 만들고 있다. 그제야 우리 가족 인생의 톱니바퀴가 잘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은 늘 실수하고 착각하기 마련이다. 아마 내가 70살이 넘어도 실수하고 착각할 것이다. 다만 그때는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져서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내려놓고 포용하고 이해하게 되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 현명한 70살이 아니고 고집이 조금 남아있는 40대이기 때문에 또 한 번 폭풍의 눈 한가운데 서 있다.
나는 청소년이 된 딸들과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다. 내가 왜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는 언제 다시 풀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청소년이 된 자아가 충만한 두 자식과 엄마는 요즘, 그다지 관계가 좋지 않다. 이 문제는 이곳이 외국이라는 점 때문이라기보다는 남편의 부재 때문이라고 해야 맞다. 그렇다. 우리 가족의 '어이'는 내가 아니고 남편이었다. 나는 '맷돌'의 '아랫돌'이고 아이들은 '윗돌'이다. 지금 우리에게 맷돌 손잡이인 '어이'가 없기 때문에 그냥 얼굴만 맞대고 있는 상황이다. '어이'의 부재로 한동안 돌지 않은 맷돌엔 거미줄도 생기고 먼지도 쌓였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지만 나는 어딘지 모르게 계속 초조하다. 인생에서 제일 활발히 활동해야 할 것 같은 그 어디쯤에 서있는데, 너무 평화로운 것이 문제다. 게다가 자아가 충만한 두 아이들은 이제 내 의견보다 자신의 생각이 더 중요해졌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이제 우리를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아직 아이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싸움이 잦아진 것을 보면 확실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초롱 초롱한 두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네, 엄마!' 하던 사랑스러운 아이는 사라진 지 오래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아직은 어수선한 아이들과, 다음 달 이사와 차량 구입의 책임을 등에 지고 있는 나는 서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게다가 작년 9월에 우리 집 문을 벌컥 연 도둑의 일로 경찰서에 한번 방문해 달라는 전화를 받고 나서 나는 더 심난해졌다. 작년부터 이어진 나의 평화로움은 다른 말로 하면 방황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일에 필요한 모든 도구와 장소는 한국에 있다. 이곳에서 아직 나의 도구와 작업실을 찾지 못해 나의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작업실이 없어도, 많은 재료가 없어도 작업은 할 수 있다. 왠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작업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그게 벌써 일 년이 지났다. 마음은 초조한데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식처를 찾고 싶어서인지 남편이 자꾸 생각난다. 남편이 있었다면 얼른 애들 키워 놓고 재미나게 살자고 농담 같은 말로 서로를 위로했을 텐데. 어른이 된 지 20년이 넘었고 그 세월 동안 세상의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이젠 정말 어른이 됐어!라고 생각해 왔다. 어쩌면 나는 남편의 등 뒤에서 얕은 파도만 겪으며 세상을 모두 알아버린 체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막아주던 큰 파도는 아직 오지도 않은 것 같은데 홀로 버티는 게 요즘 종종 힘들다. 거기에 자아가 충만해진 딸 두 명이라니!
안다.
아직 다 살진 못했어도 알 수 있다. 모든 게 지나가면 지금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걸. 세상의 이치는 그렇다.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지친 마음과 남편의 그리움, 그리고 세상의 이치가 함께 내 마음속에 있다. 아이들은 훌쩍 커버려 내 품을 떠날 것이고 지금 이 시간이 좋든, 싫든 간에 정해져 있는 시간이다. 시간은 한 번도 틀린적이 없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남편이 그립지만 함께할 순 없으니 그리움을 잘 포장해 뒀다가 나중에 둘이 앉아 하나씩 풀어볼 시간이 올 것이다. 이사도 어찌저찌하게 될 것이고 차를 사는 순간이 올 것이다.
내가 지금 해결해야 하는 건, 조금씩 자라는 아이들과 나의 관계다. 나의 의견에 반대하며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아이를 어떤 면에선 기특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남편도 없는 마당에 왜 이렇게 얄미운지, 아직도 나는 마음 넓은 엄마가 되지 못했나 보다. 마음 넓은 아빠가 있었다면 '그래 그래, 오냐오냐' 했을 것이고 나는 못 이기는 척, 애꿎은 남편에게 애 버릇 나빠진다고 핀잔을 주는 걸로 상황이 마무리가 되었을 테지. 그게 그동안 우리 가족이 만들어 놓은 잘 맞는 톱니바퀴였다.
제일 중요한 톱니가 빠지니 영 시원찮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다. 기름 잔뜩 두른 팬에 고기와 김치를 볶아서 일단 휴전을 해야겠다. 이사부터 하고, 차부터 사고, 다시 2차전이다.
애들이 조금 알아주면 좋으련만. 니들만 힘드냐. 엄마도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