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지 못하는 사브레

by 게으른 곰

3월 10일, 이쯤 되면 봄 냄새가 서서히 느껴질 만도 한데 내가 결혼하는 그날, 폭설이 내렸다. 폭설에다가 지방에서 올린 결혼식엔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참석해 축하를 해주었다. 축가를 불러주기로 한 친구는 교통체증 때문에 노래 시작 1분 전에 도착해 축가를 시작했고, 뛰어와서 인지 아니면 고음이 많은 노래라 그랬는지 생동감 넘치는 축가를 불렀다. 웨딩카로 준비된 차는 내려오던 중 고속도로에서 돌이 튀어 앞 유리가 갈라져있었다. 운전한 친구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들었던 결혼식 행사에 우리는 모든 순서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공항으로 향했다. 앞유리가 깨진 그 차를 타고. 인사도 없이 떠났다고 섭섭해하시는 어머님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릴 정신도 없었을뿐더러 신혼여행에 가지고 가야 할 작은 짐가방도 두고 왔다. 공항 근처 호텔에서 머리에 100개 정도 꽂힌 핀을 제거하고 겨우 정신을 차린 우리는 가방을 놓고 온 이유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근처 마트에 가서 옷 몇 개를 구입했다. 우린 이렇게 정신없이 바쁘고 즐길 수 없는 결혼식을 올렸다.


이렇게 초보티 팍팍 내며 결혼을 한지가 올해 고등학생이 된 첫째의 나이와 똑같은 횟수이니, 꽤 오래되었다. 그동안은 쭉 부부가 함께 결혼기념일을 보냈고, 올해는 부부가 따로 결혼기념을 보내는 두 번째 해다.


작년부터 남편과 따로 살기 시작했다. 결혼기념일은 물론이고 가족 생일도 함께 하지 못한다. 작년부터 나는 아이들과 뉴질랜드에 와있다. 우리는 학교 여름 방학 동안(12월, 1월) 한국에서 지내는데 큰 애는 1월 생이라 가족이 같이 보낼 수 있다. 남편 생일은 4월이다. 1학기가 끝나고 짧은 방학이 시작되는 때라 남편이 뉴질랜드로 우리를 만나러 왔다.(뉴질랜드는 1년에 4학기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2주의 방학이 있고 4학기가 끝나고 학년이 바뀔 때 2달간의 긴 여름방학이 있다.) 내 생일은 8월이다. 이쯤 남편이 한번 더 올 계획인데 구체적인 날짜는 아직 정하지 않아 생일을 같이 보내게 될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작은 애 생일과 결혼기념일은 남편 없이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3월과 9월은 방학이 아니고 가족과 곧 만날 예정이거나 혹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남편의 휴가 일정으로 선택받지 못했다. 이 사실이 섭섭할 만도 한 나이인 둘째는 아무렇지 않게 이 사실을 받아들였고, 나는 작년 둘째 생일에 태어나 처음 케이크를 구웠다. 그리고 나와 첫째가 다 먹었다. 케이크는 빵이 딱딱하게 되었고, 둘째는 맛없는 걸 먹지 않는다.


지난 일요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시차가 4시간밖에 차이 나지 않지만, 살아보니 4시간은 꽤 시차가 크다. 여기가 아침일 때 한국은 새벽이고, 이곳이 오후가 되면 한국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이 날 우리는 저녁을, 남편은 늦은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다. 작년에도 그랬다. 우리는 화면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하며 식사를 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준비하고 화면에 잔을 부딪히며 축하했다. 각자 먹는 음식의 맛 평가를 하기도 하고 늘 하는 걱정의 잔소리가 오고 간다. 결혼한 지 벌써 이렇게 오래됐다며,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새삼 놀라운 사실을 나누며 시간의 소중함도 새긴다. 그날이 올해도 다시 돌아왔다. 쓸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유난히 혼자 눕는 잠자리가 쓸쓸하다. 내가 아침을 준비할 때도 우리가 함께였다면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이라고 뒤에서 꼭 안아줬을 것이다. 그럼 나는 '진짜 같이 오래 살았다'는 괜한 소리를 하며 요리하는데 귀찮게 하지 말라고 그를 밀어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정에 남편에게 결혼기념일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내고 잠에 들었다. 결혼기념일 아침 눈을 떠보니 남편에게 편지가 와있다.



le5.jpg 남편은 편지를 종종 쓴다.

종이에 쓴 편지는 화면으로 배달됐다. 남편은 편지를 종종 쓴다. 우리가 연애를 할 때는 매일 껌종이 뒷면에 편지를 써서 줬다. 같은 회사에 다녔었는데 점심 식사 후 그는 나에게 매일 껌을 건넸다. 편지와 함께 말이다. 일 년에 내 생일, 결혼기념일에만 편지를 쓰던 남편은 더 자주 편지를 쓴다.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편지를 쓰는 거 같아 한편으로 덩달아 슬프다. 이번엔 나를 슬프게 한건 편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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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와 함께 배달된 약통과 사브레 사진. 요즘 부쩍 피곤해하는 남편 먹으라고 영양제를 하나 보냈다. 그게 도착했나 보다. 그리고 남편이 나에게 사준, 먹을 수 없는 사브레다.


나는 과자를 많이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단 음식을 싫어한다. 과자를 즐겨 먹는 남편과 결혼하고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 나는 잠깐동안 사브레를 자주 먹었다. 바삭한 사브레가 내 입에 맞았던 모양이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사 오라고 부탁한 과자다. 그때 이후로 남편은 슈퍼에 갈 때마다 사브레를 사 왔다. 과자를 안 먹던 사람이 과자를 맛있게 먹는 그 모습이 그에게 좋았나 보다. 이제 사브레 안 먹고 싶다고 몇 반말하나 뒤로 남편의 사브레 구입은 뜸해졌다. 그래서 잊고 있었는데, 다른 말 없이 보낸 사브레 사진 한 장 때문에 눈물이 고였다. 떨어져 있지만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아침부터 나를 울렸다.


종일 청소하고 치킨과 떡볶이를 사 왔다. 그리고 남편과 만났다. 아이들과 함께 긴 대화를 나누며 결혼기념일을 축하했다. 따로지만 함께했다. 이렇게 멀리서 각자 보낸 2회 차 결혼기념일이 지났다. 이제는 이곳 생활이 어느 정도 적응되어 예전만큼 힘들거나 외롭지 않다. 혼자 사는 방법을 많이 익혔다. 남편도 혼자 사는 방법을 익혔을 것이다. 우리가 헤어지기 전 누가 그랬다. 혼자 사는 게 익숙해지면 같이 사는 게 힘들다고 했다. 아직 그만큼은 아닌가 보다. 시간이 더 흐르면 그렇게 될까? 아직은 모르겠다. 한 달 후 남편 생일은 온 가족이 모여 축하를 할 것이다. 나는 그때가 벌써 설렌다. 진짜 컵을 부딪히며 '짠' 할 생각을 하니 기쁘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그때는 와닿지 않았던 '행복'이 뭔지 나는 이제 안다. 같이 둘러앉아 음식을 나눠 먹으며 오늘 하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콧방귀 나올 정도로 사소한 그게 진짜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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