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처럼 팔랑이며 살면 좋겠다

있는 그대로를 끌어안기

by 춤추는바람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모습은 사랑스럽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에게 충실한 모습은 아름답다. 우러나는 마음에 따라 진솔하게 행동할 때 가장 자연스럽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그런 것 같다. 똑똑하고 지적이지만 딱딱하고 고지식한 사람이 아니라 부족하더라고 자유롭고 사랑스러운 사람, 그래서 자연스러운 사람. 세상을 향해 넉넉하게 열려 있는 유연한 영혼을 가진 사람.




*


딸아이와 남편, 그리고 나, 셋이서 놀이터에서 잡기 놀이를 했다. 놀이터 한 편에는 아이들이 한 번에 점프해서 올라갈 수 있는 높이의 낮고 작은 언덕이 여러 개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 듯 언덕 위로만 뛰어다니는 놀이다. 그중에는 놀이터 중심을 향해 넓고 높게 둔덕이 이어지는 게 하나 있다. 거긴 ‘타임’ 공간이라 술래가 들어갈 수 없어 마음껏 쉴 수 있다. 대신 한 게임에 세 번만 갈 수 있다.



셋이 한창 놀고 있는데 빼빼 마른 여자 아이 하나가 다가왔다. “같이 놀아요.” 나와 딸아이는 같이 놀고 싶어도 부끄럽고 어색해 끼워 달란 말을 하지 못하는데. 먼저 다가와 같이 놀자고 하면 그저 반가웠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이안(신유진 작가님이 애정 하는 이름, 이안!)이었다. 우리 아이와 키가 비슷해 또래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여덟 살 초등학생 언니였다. 그런데도 어찌나 개구쟁이처럼 놀던지. 몸이 가벼워서 움직임은 날렵했고 언덕 위로 잽싸게 뛰어다닐 때면 날다람쥐 같았다. 연약해 보이던 첫인상과 달리 아주 활달하고 명랑한 아이였다.



술래에게 잡힐까 무서워 ‘타임’ 존에서 시간을 보내는 딸아이와 달리 그 아이는 용감하게 언덕 위로 뛰어드는 스타일이었다. ‘나 잡아봐라~’하고 술래를 놀리듯 공격적으로. 그러느라 자주 미끄러지고 넘어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벌떡 일어나 달리고 도망쳤다. 나와 남편에게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깡총 뛰어올라 눈을 가리거나 몸을 끌어안아 못 움직이게 했다.



그런 이안이가 자유로워 보였다. 열심히 뛰어다니느라 말갛던 얼굴은 분홍빛으로 달아올랐고 수시로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거리낌 없이 움직이고 뛰어노는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어디서든 저렇게 노는 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곳,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음이 이끄는 대로 놀이에 몰입하는 아이. 그런 아이가 부러웠다.



낯을 가리지 않고 겁이 없는 것, 타인과의 거리를 금세 좁힐 수 있는 건 그 아이의 타고난 성향일 것이다. 먼저 다가와 놀자고 말하고 모르는 사람이 있어도 행동에 변화가 없는 것도. 그래서 다칠까 봐 아슬아슬하고 때론 어수선했지만 아이다운 모습이 보기 좋았다.



딸아이는 낯선 곳에 가면 말도 못 하고 얼음이 되어 버린다. 엘리베이터나 가게에서 누가 먼저 인사를 건네도 답을 못한다. 쑥스럽고 부끄럽다고 한다. 나 또한 그런 성향이라 억지로 아이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유롭게 노는 아이들을 보면 조심스런 우리 아이의 성격이 삶을 즐기는데엔 제약이 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면서 거리낌 없이 나를 드러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 우리 같은 내향인은 타인의 시선에 늘 전전긍긍한다. 미리부터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자신을 숨기고 도망갈 구멍부터 찾는다. 그러느라 시도하지 못하고 제대로 즐길 기회마저 놓친다. 밖에 나가자고 하면 무조건 “싫다” 소리부터 하는 딸아이. 무리 지어 노는 아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같이 놀자” 소리는 못 하는 아이가 안타깝다. 아이의 타고난 성향 때문일 테지만 나의 양육 방식이나 생활 태도가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이 늘 따라다녔다. 사람들 앞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 잘하지 못하면 안 하려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실수할까 봐 몸이 굳고 생각이 멈췄다. 다른 사람들이 칭찬해도 스스로 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잘한 것 같지 않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이러 저러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자신의 부족한 점만 들여다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마흔 중반을 넘어서니 그런 기준과 가치가 부질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잘 하려는 욕심과 올바라야 한다는 강박으로 경직된 삶보다 유연하게 즐거움을 받아들이고 많이 사랑하는 삶이 더 좋을 것 같다. 도덕적 가치나 사회적 기준에 얽매여 스스로를 괴롭히느라 삶이 고단하고 사랑은 귀찮은 일이 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까칠하게 굴었다. 아이에게 했던 무수한 “안돼”, 타인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종용했던 말들, 퉁명스럽고 뾰족했던 그 모든 말을 싹 주워 담아 쓰레기통에 넣고 싶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지 않다. 잠시 주목했다가도 금세 잊어버린다. 삶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고 추구하는 가치 또한 다양한 모양을 지니고 있다. 어느 것이 더 우월하거나 무엇이 더 낫다고 견줄 수 없거니와 각자의 삶에 충실한 것으로 충분할 테다. 실수는 피해야 하는 게 아니라 많이 겪으며 배움으로 바꿔나가야 할 좋은 기회다. 그러니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위험을 야기하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많은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실패가 없는 삶이란 무엇도 시도하지 않은 삶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아 매끈해 보이는 삶보다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흠집이 생기고 깨지기도 한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려지는 고유한 무늬의 아름다움을 믿게 되었다.




*


이안이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이가 이안이처럼 살면 좋겠다고. 타고난 성향을 바꾸긴 어려울 테지만 거기에 고착되게 하진 말아야겠다. 그러니까 더 풀어주고 더 너그러운 환경을 만들어줘야겠다. 실수를 포용하고 도전할 수 있게 수시로 격려하면서. 그러려면 나부터 자신에게 너그러워야 하지 않을까. 규칙과 기준으로 단단하게 세운 벽을 낮추고 사이사이 작은 문을 만들어야겠다. 때로는 불어오는 바람 따라, 날아오는 나비 따라, 샛길로 빠져나갈 수도 있게. 잘 못 할까 봐, 넘어질까 봐, 누가 뭐라고 할까 봐, 움츠러들지 말고. 넘어지고 실수해도 괜찮다고,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말해주자.



어릴 적 늘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덤벙대지 말고.” “칠칠치 못하게…” 그런 말이 나를 차분하게 만들고 질서 정연한 모습이 되게 이끌었다. 어떤 말을 들으며 자라는지는 중요하다. 어린 시절의 말은 나도 모르게 몸에 새겨지니까. “실수해도 괜찮아. 다시 하면 돼. 그러면서 배울 거라고 믿어.” 아이를 격려하고 믿어주는 말, 그런 말로 아이를 키우고 싶다. 두렵고 무서워 놀지 못하는 것보다 넘어져도 괜찮으니 놀면서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라고. 그러면서 어려움을 이겨내는 연습을 하고 상처에 절망하기보다 희망을 놓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 되라고.



더 가볍게, 더 자유롭게, 더 즐겁게 살아도 될 것 같다. 더 엉클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 그게 놀이를 즐기는 방법이듯, 그런 자세가 인생을 편안하게 누리는 방식일 것 같다. 자신의 마음에 충실히 따르며 온전히 놀이를 즐기던 이안이처럼. 힘을 빼고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춤을 추자. 자유롭고 자연스러워 사랑스러운 몸짓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