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해 물들어간다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법

by 춤추는바람





사랑은 쉽게 잊히곤 한다. 살아가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건만, 삶이 당연하다는 듯 사랑도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다루어질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사랑을 하면서도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잘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사랑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의 말이 바람처럼 달빛처럼, 봄기운처럼 우리에게 건너올 때가 있다. 사소해서 알아채지 못하는 순간, 어둠 속에 스미는 어둠처럼, 밝음 속에 더해지는 밝음처럼, 세상의 농도가 짙어지는 때가 있다.




*




“스무 살이 되면 서윤이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그래?...... 그때 엄마는 어디 있는데?”

“어디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 옆에 있어?”

“그럼, 서윤이 곁에 있지. 왜?”

“아……, 하늘나라엔 언제 가는데?”

“그건 더 나중에. 아주 아주 나중에.”

“백 년 있다가?”

“응, 백 년, 아주 오래 지나고……. 엄마가 하늘나라에 가지 않으면 좋겠어?”

“응, 엄마가 계속 내 옆에 있으면 좋겠어. 하늘나라에 가지 말고. 엄마도 나도 하늘나라에 가지 않으면 좋겠어.”

“그래, 우린 하늘나라 가지 말고 영원히 같이 있자.”


하늘나라는 아이에게 어떤 곳일까. 스무 살은 얼마나 먼 나중일까. 영영 자기 마음대로 모든 걸 하지 못하더라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이 말은 어딘가에 봉인해두고 싶고. 언젠가 그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더라도 나만 아는 곳에 ‘영원’의 이름으로 남아 있도록. 그런데 이런 사랑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게도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왕이고 그녀에게 모든 사랑을 바치고 싶은 충직한 신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고 열렬했는지 아직도 기억하니까. 엄마가 기뻐하는 일만 하고 싶었던 건 순전히 엄마를 사랑해서, 엄마가 웃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아서였다. 한 존재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은 어디서 시작되는 걸까. 사람은 거울처럼 자신을 바라봐 주는 사람을 보고 배우며 성장하는 존재라던데 어린 시절 나를 채웠던 사랑은 엄마가 보여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내게 가장 커다란 사랑을 건네는 아이의 시선에서 어린아이인 나를 바라보았을 엄마의 시선을 떠올린다. 삶과 사랑은 세대에서 세대를 건너, 이렇게 모서리를 맞대며 영원으로 흐르는지 모른다.



살면서 마지막까지 배우고 고민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하면 더 잘 사랑할 수 있을까, 이것 밖에 없는 것 같다. 산다는 건 사랑하는 것, 그러니 잘 살고 싶다는 건 잘 사랑하고 싶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늦지 않게 아낌없이 사랑하는 일이 잘 사는 일이 될 것 같다. 사랑은 어둠에 어둠을 더하고 밝음에 밝음을 더하는 일, 사랑은 우리의 윤곽선을 또렷하게 해 주는 일이다. 내가 여기 있음을 당신이 거기 있음을 생생하게 느끼며 서로를 끌어안으려는 일이다. 삶도 그렇지 않은가. 눈앞의 대상을 생생하게 느끼고 그 속으로 말없이 걸어 들어가는 것, 그런 게 사는 일. 삶에 스며들듯 사람에게 스며들며 살고 사랑한다.




*




아침 해가 동남쪽 하늘로 솟아오르는 시간에 달리기를 하면 속눈썹 끝에 맺히는 빛의 노래를 볼 수 있다. 그런 순간엔 '우리는 우리가 영원불멸하다는 것을 느끼고 안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이해될 것 같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가늘고 마른 가지들이 혈관처럼 허공으로 뻗어 나가는 게 보인다. 가느다란 가지로도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하늘을 찌르는 나무들. 그 꼭대기에 홀로 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새를 발견하기도, 다른 나무에는 해를 바라보느라 노랗게 가슴이 물들어버린 새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속에 가만히 손을 담가본다. 바라보는 대상 속으로 스며들 것 같은 기분, 사랑은 그렇게도 온다.



겨울 햇살과 마른 가지, 먼 곳을 응시하는 새와 노랗게 물들어가는 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야지.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일이라는 걸 기억하면서. 그렇게 스며드느라 내게 온갖 빛깔로 물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루어질 수 없더라도 순간에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새기는 약속이 있다. 아이의 작은 가슴에 마른 나의 가슴을 맞댈 수 있다면 사랑으로 시간을 봉인할 수 있다. 햇살같은 아이를 바라보느라 내 가슴도 노랗게 물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