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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Aug 06. 2022

"파이팅!"

당신에게 건네고 싶은 말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집안 가득 들어찬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한 채 고여버린 저녁, 아이를 달래 공원으로 나간다. 그래도 뻥 뚫린 공간으로 가면 바람이 오가며 흐름을 만드니까. 끈적끈적한 공기는 참을 만 해지고 서서히 내리는 어둠 아래 사위가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흐려진다. 희미해지면서 둥글어진다. 몸에 고인 열기와 긴장감도 풀린다.


해가 진 직후나 그 무렵 공원을 나가면서 자전거 타는 할아버지를 만나고 있다. 젊은이처럼 검정 반바지에 야구 모자를 쓰고 검은색 자전거를 타며 날쌔게 운동장을 도는 할아버지. 우리가 도착하면 이미 거기에 있고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여전히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는 할아버지.


처음 할아버지를 알게 된 기억은 유쾌하지만은 않다. 천천히 운동장 가장자리를 도는 나와 아이 곁을 할아버지가 빠르게 지나치며 알 수 없는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네 발 자전거를 타는 아이 옆으로 내가 나란히 걷느라 트랙의 많은 공간을 차지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충분히 자전거가 지나갈 공간은 있었지만. 혹시 모를 충돌 사고를 예비하려고 그랬까. 문제는 할아버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비켜~” 인지 “바이크~”인지, “저기요~” 인지 아리송한 짧은 구호를 던지고 쌩하니 우리를 지나쳐 갔다. 조금 당혹스럽고 조금은 불쾌했다. 낮고 굵은 저음의 목소리, 명확하지 않은 발음, 무심히 내뱉은 듯 퉁명스럽게 느껴지는 말투. 아이도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입을 삐죽거리며 이렇게 물었다.

“할아버지가 우리한테 뭐라고 한 거야?”


그 뒤로는 할아버지의 자전거를 예의 주시하며 걸었다. 괜한 소리를 들을지 몰라 할아버지의 자전거가 가까이 오면 한 옆으로 비켜섰다.


그렇게 서너 번 자전거 타는 할아버지를 만났고 가끔 알 수 없는 외침을 들었다. 자전거의 속도 때문에, 예상할 수 없어서인지, 불명확한 발음 탓인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우리한테 한 건지, 혼잣말 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와 나는 어느새 할아버지의 까만 자전거가 있나 없나 무의식적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반은 경계심으로 반은 호기심으로.


여름휴가로 여행을 다녀오는 바람에 며칠을 건너 공원에 나간 날이다. 운동장에 막 들어서는 찰나 할아버지의 자전거가 우리 앞을 휙- 지나갔다. 동시에 무심히 던진 듯한 한마디가 날아들었고. 조금 또렷하고 반가운 기색도 느껴지는 그런 말. “하우 아 유?!”


거기엔 우리 둘 밖에 없었으니까 우리에게 한 말이 분명했다. 


아이가 물었다.

“할아버지가 뭐라고 했어?”

“하우 아 유! 하우 아 유래. 잘 지냈냐고, 우리가 반가운가 봐.”


어느새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온 할아버지가 우리 곁을 지나며 또 한 번 말했다. “파이팅!” 이번엔 나도 재빨리 “파이팅!”하고 답했다. 물론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건 자전거를 타는 자신에 대한 응원 같으면서 자전거를 타는 딸아이에게 건네는 응원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르지만 비슷한 시간에 자전거를 끌고 나온다는 이유로 조금은 서로를 알 게 된 걸까.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인사말이 터져 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 말은 자신처럼 자전거를 타는 딸아이를 향한 것 같아 “너도 말해봐~”하고 아이를 부추겨보았다. 쑥스러운지 할아버지가 지나갈 때면 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아이. 그러다가도 할아버지가 쌩- 지나가고 나면 ‘큭큭큭’ 웃음을 터뜨리며 재미있다는 듯 “파이팅이래, 파이팅~”하며 따라 했다.


그날따라 할아버지는 여러  우리 곁을 지나며 짧은 말을 계속 건넸다. 하우  , 파이팅, 굿 이브닝~ 같은 . 우리는 할아버지의 말을 재빨리 알아채지 못해 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할아버지가 뭐라고 했냐고,  영어로 말하냐고 묻는 아이와 추측하고 상상하며 걷느라 지루하지 않았다.


그런 날이 반복되면서 어정쩡하던 우리의 화답도 명확해졌다. 할아버지가 “파이팅!”하고 지나갈 때 재빨리 “파이팅!”하고 목소리를 키워 답한다. 그러고 나면 다리에 힘이 솟는 것도 같고 걷는 게 아니라 달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할아버지 나오셨을 것 같아. 빨리 가보자.”

이제는 할아버지가 나왔는지 여전히 쌩-하고 자전거를 달리며 단번에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단어를 던질지 궁금해하며 산책을 나간다. 그러다 보면 이런 마음이 든다. 할아버지도 우리가 나오길 기다릴지 모른다고. 우리가 안 나가면 서운해하며 돌아갈지 모른다고.



“우리는 몸으로써 서로를 이해한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몸을 가진 존재이기에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1990년대 초 이탈리아 파르마의 뇌과학 연구소에서 발견되었다. (…) 몸을 가진 인간의 뇌는 타인의 체험을 자신의 운동 언어로 번역해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인간은 공감하는 동물이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목정원 작가는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인이 느끼는 감각을 공감할 수 있다고 썼다. 몸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그러고 보니 비가 퍼붓는 날 달리기를 했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엄지를 척 들어 보여주고 가서 으쓱했다는 이웃 블로거의 글이 떠오른다. 서로를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상대의 모습만 보고도 서로에게 감응할 수 있는 우리. 우리에겐 몸이 있어서 직접 말로 듣지 않아도 상대가 몸으로 느끼는 감각을 짐작하고 공감할 수 있다. 


자전거를 달리느라 할아버지의 다리는 뻐근하고 숨은 가쁠 것이다. 그런데도 속도감이 주는 쾌감이 있을 것이고 그건 무언가 소리 내어 말하고 싶을 때의 기분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서서히 식어가는 여름 저녁의 미지근한 바람이 빠르게 뺨을 스치는 감각도 즐거울 테지. 더위에 주눅 드는 대신 뜨거운 여름날을 시원한 질주로 마감하는 일은 꽤나 유쾌할 것 같고. 그런 할아버지의 기분이 절로 상상이 되면 “파이팅!” 더 큰 소리로 말하고 싶어 진다. 내일부터는 운동화를 신고 나가 힘차게 달려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은근하게 지속되는 할아버지의 자전거 사랑이 여름의 열기처럼 뜨겁게 다가온다. 젊은이처럼 영어 단어로 인사말을 건네는 경쾌함도 좋고. 그런 할아버지의 일상과 우리의 일상이 운동장 트랙 위로 나란히 달리고 걷다 문득문득 스치는 인연도 좋다. 여름밤 산책을 즐겁게 해 줄 우연한 친구가 생긴 것 같다.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저녁마다 운동장을 나가다 보면 어느새 여름도 끝날 것이다. 그때 즈음이면 우리 사이에 어떤 말들이 쌓여 있을까. 그때도 여전히 하우 아 유, 굿 이브닝, 파이팅 정도만을 주고받고 있으려나.


어쩌면 여름밤 동안만 지속될지 모르는 만남. 조금 이상한 우정이 싹트고 있는 것 같다. 서로를 모르면서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감각을 공유하는 관계가.


아직 여름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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