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말
결혼식에 다녀왔다. 남편 외가 쪽 친척이라 당사자를 직접 만난 적은 없고 이름만 몇 번 들어본 사이다. 결혼 축하보단 코로나 19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척들의 얼굴을 본다는 의미가 더 큰 자리였다.
결혼한 지 햇수로 십사 년이니 그 사이 친척 어른들의 얼굴엔 주름이 하나 둘 늘었을 테다. 그만큼 내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앉았을 테고. 그런데 어른들의 모습은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시간의 더께를 알려주는 건 오히려 아이들이다. 꼬맹이들이 훌쩍 자라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게 삶이 계속되어 왔음을,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해주는 확인 같아 반가웠다.
결혼식장이 여러 세대의 표본을 모아 둔 연극 무대 같았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만나는 축제의 장. 꼬맹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는 걸 보니 나의 과거를 보는 것 같고, 곱게 기른 딸자식을 시집보내는 어른을 보니 언젠가의 나도 그럴까 싶고. 누군가는 나를 보며 어린 자식을 키우는 엄마의 모습에 자신을 포개며 과거를 혹은 미래를 떠올렸으려나.
식장이 들썩거리다 예식이 시작되었다. 상기된 표정의 신랑, 해사하게 미소를 띤 신부가 입장했다. 어느새 나는 전적으로 결혼을 축하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여전히 이토록 순수하게 결혼을 고대하며 기뻐하는 커플이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몇 년 전엔 나도 저렇게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 듯 웃고 있었을까. 우리의 사랑만은 순수하게 영원히 지속될 거라 믿었던가. 단상 위로 행진하는 커플을 쫓아 멀리 시선을 던졌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멀리, 언젠가의 나의 결혼식 날로 멀리, 멀리.
결혼을 결심할 땐 구체적으로 인생을 계획하거나 조목조목 따져 계산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와 함께하는 매일을 꿈꿨으리라. 비슷한 취향에 웬만한 형편, 그럭저럭 큰 탈없이 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설령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둘이라면 견딜 만하지 않을까. 거기다 혼기를 놓친 딸을 빨리 시집보내고 싶은 엄마의 성화가 불을 붙였고 당시엔 남자 친구였던 남편의 한없이 다정하고 너그러운 성품이라면 모든 걸 포용해줄 거라고 믿었다. 시간에 닳아버릴 감정의 취약함이나 생활이 새겨 넣을 피로와 주름, 때때로 덮칠 삶의 무게나 그 사이에서 저울질하게 될 역할과 책임 같은 건 추상적이라 와닿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결합을 통해 전적으로 서로를 믿었기에 가능했던 멋진 일도 많았다. 힘들게 번 돈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시골 마을을 자동차로 누비고 다녔고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작은 가게도 열었다. 나의 선택을 응원하고 기꺼이 동참해준 남편 덕분이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누군가의 아픔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의 순간도 닥쳤다. 혼자가 아니라 버틸 만했고 서로에게 기댈 수 있어 무사히 어둠을 통과했다.
세상 모든 걸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아이도 얻었다. 열 달 아이를 품고, 출산을 하고 밤잠을 설치며 아기를 키우는 동안 우리 둘은 한 묶음처럼 존재했다. 서로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움직이는 사이 두 사람의 삶은 하나로 연결되었다. 우리는 아이를 통해 또 다른 사랑의 실험을 하고 있다. 셋이서 엮어 나가는 하나의 삶. 서로 다른 세 개의 실이 교차하며 무늬를 그려가는 도중에 있다.
신부는 조명이 닿을 때마다 오묘하게 빛나는 드레스를 입고 단상 위에 서 있었다. 드레스를 가득 수놓은 보석처럼 오늘의 예식이 오로지 신부를 빛내기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어쩌면 저때는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중심이 되어 누구보다 빛나는 삶을 살고 싶다고. 그런 기대로 결혼을 했기에 결혼의 진실을 목도했을 때 휘청거렸나 보다.
결혼은 우연히 교차한 두 사람의 삶에 매듭을 만든다. 매듭 이후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패턴의 무늬를 그리기도 한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삶을 온전히 끌어 안기 위해 흔들리고 깨지기도 하면서. 그러느라 한없이 자신을 지워야 하는 날도 있다. 어느 날엔 희미해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하지만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건 기쁨과 즐거움만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의 감각이 더해진 강렬한 경험일 것이다.
타인과 깊게 연결되는 일은 커다란 기쁨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통스럽고 외로운 싸움일 때도 있다. 그런 과정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진정한 성장을 하는 것 같다. 그런 날들이 쌓여 빛나지 않고 주목받지 않더라도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가 일궈가는 삶은 그 자체로 귀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이후, 한때 내 삶이 빛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엄마로, 아내로, 누군가의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 같아 우울했다. 하지만 삶의 시기에 따라 주어지는 역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걸 아이가 성장하면서 알게 되었다. 전적으로 아이에게 묶여 있던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고 있으니까. 남편과 나 사이 관계의 기울기와 감정의 폭도 때에 따라 넓고 깊게 움직이며 새로운 지도를 그려간다.
한때 나를 잃은 것 같아 슬펐던 것은 누군가의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의 삶이 포개지며 만들어진 낯선 무늬로 삶의 빛이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알 수 없는 방식으로 겹치며 생성되는 빛은 하나의 색으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오묘한 것일 테고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선명한 것도 아닐 테니까. 스며들고 섞이며 색을 만드는 중이라 혼돈을 겪기도 한다. 삶의 어떤 조각은 타인에게 내어줌으로써 의미를 얻고 그때 다시 빛을 얻는다는 걸 배워간다.
단상 위의 두 사람과 가족들 얼굴엔 순전한 기쁨이 가득했다. 인생의 새로운 출발, 설레고 두근거리는 모험의 시작. 삶이라는 미지의 길에 드물게 찬란한 불이 밝혀지는 선물 같은 순간이다. 새로이 삶을 묶는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자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빛무리가 보였다. 발 밑만 보던 좁은 시선을 멀리 던질 때 어렴풋이 드러나는 빛의 잔상. 혼자서는 불가능한 삶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며 소중해지는 관계를 깨달았다. 삶에는 시간을 견디고 낡아가면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 있다고.
남편과 다녔던 여행지 중 아끼는 곳 하나는 피렌체. 그곳 우피치 미술관에 들렀던 날이 떠오른다. <비너스의 탄생>을 보고 있던 노부부의 뒷모습 때문인데 머리가 하얗게 세고 등이 구부정한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간간이 서로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어 시야에서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삶을 묶고 서로의 일부로 스며들며 살아온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들이 공유한 기쁨과 슬픔, 고통과 환희, 성취와 상실, 온갖 상처가 더해진 시간은 단순히 길이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일 텐데. 모든 삶의 굽이굽이를 잴 수 있는 척도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반드시 해야 한다고, 무조건 하면 안 된다고 잘라 말할 수 없는 결혼에 대해, 지금은 이 정도로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때로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낱낱의 문제를 해체하며 바라보다가도 어떤 순간 익스트림 롱 샷으로 멀어질 때 뭉클하게 소중해지기도 한다고. 그러므로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거리감인 것 같다. 한 발 물러서 생활의 얼룩을 지우면 비로소 드러나는 빛이 있다. 나와 남편, 아이라는 세 가닥의 실이 자아내는 삶의 무늬, 우리라는 풍경이. 나만이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을 결혼이라는 액자에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