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의 말
결혼을 하면서 어린 시절과 작별이라도 하겠다는 듯 많은 물건을 친정 집에 두고 나왔다. 옷도 당장 필요한 것과 손이 많이 갔던 몇 가지만 추려내고 대부분은 놔두었으니 다른 물건은 별로 챙긴 게 없다. 신혼집을 친정 가까이에 얻은 탓에 마음먹고 짐을 옮기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다. 결혼하고도 한동안은 필요한 게 생기면 친정집에 들러 가져왔다. 선풍기, 그릇, 냄비…, 그런 식으로 엄마네 집에서 훔쳐오듯 빼 온 살림살이도 몇몇 있지만, 두고 나온 게 더 많다는 느낌이다.
자라면서 사용했던 물건은 여러 형제가 나누어 쓰느라 닳고 낡아 있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맞추느라 적당히 고른 것들은 특별한 취향이나 미적 감각을 담고 있지 않았다. 사 남매가 같이 자라느라 한 번도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고 집은 이런저런 물건으로 가득 차 복잡하고 어수선했다. 계단에 서랍장을 두고 쓸 정도였으니 공간은 늘 부족했다. 그래서인지 애지중지 아꼈던 것이나 사연이 담긴 물건이 없다. 그런데도 꽁꽁 싸매 들고 나온 게 하나 있는데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카드, 종이쪽지까지 모아 둔 라면 박스만 한 상자다.
뭘 사달라고 졸라 본 기억이 없다. 갖고 싶은 게 많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빠가 벌어오는 월급으로 네 아이를 키웠으니 엄마의 지갑은 늘 헐거웠다. 어려서부터 그런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으니 일찍 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형편에 맞춰 사는 사이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욕망도 사라졌던 걸까. 사물에 마음을 담는 법, 정성을 들여 간직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물건에 대한 애착을 기르지 못한 대신 활자에 대한 애착을 키웠으려나. 종이 위에 꾹 꾹 눌러 적은 글자에 마음을 쏟았다.
오래전 나는 줄곧 편지를 쓰는 아이였다. 방학이면 단짝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색이 고운 편지지를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예쁜 글씨로 정성껏 채웠다. 방학이 즐겁지만 그런데도 나는 네가 보고 싶고 너를 만날 개학을 기다린다는, 별 내용 없는 편지. 그런데도 편지를 쓰느라 골몰하고 우표를 붙여 빨간 우체통에 넣는 일, 그 후엔 매일 우리 집 대문의 우편함을 열어 보는 일에 들떠 며칠을 보냈다. 학기 중에도 편지 교환은 계속되었다. 막상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의 반의 반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헤어지고 나서, 그 상황이 지나고 나서야 한 발 늦게 도착하는 마음들이 있었다. 그러니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마음 깊이 남아 있는 말을 쓰기 위해 편지지를 고르고 문장을 적어 내려가곤 했다.
누군가에게 닿고 싶고 누군가를 알고 싶어 열렬했던 마음이 상자 속에 모여 있다. 말로 하지 못해 글로 적히는 마음은 매번 한 박자 늦거나 한 사람에게만 유효해 상처받고 슬픔에 잠기기도 했지만, 종이 위에 적어 내려갈 수 있어 위안이고 기쁨이었던 많은 날들이 있었다. 그 날들 덕분에 지금도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고 있나 보다. 글을 쓰는 건 수신인이 없는 편지를 쓰는 마음과 비슷하고, 끊임없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마음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닿고 싶고 누군가를 알고 싶어 글을 쓴다. 말로는 온전히 태어나지 못하는 마음에 글은 조금 더 세심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으며.
임신을 하고 보드라운 천으로 만든 인형을 샀다. 애착 인형이라고 부르는 것. 내 아이에게는 예쁜 인형을 사주고 고운 새 옷을 입히고 싶었다. 태어날 아기를 위한 작은 방은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소품으로 채웠다. 애착 인형 없이 물려받은 옷을 입어야 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처럼. 아이가 사랑스러운 인형에게 마음을 쏟고 아기자기한 꿈을 키우길 바랐지만 아이는 인형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인형을 찾을 때도 있었지만 잠자리에선 엄마 품만 찾았고 사은품이나 뽑기로 얻은 얄궂은 인형에 더 좋아했다. 사람마다 관심의 대상이 다르고 마음을 쏟는 방식이 다르다는 걸, 무언가가 부족했던 유년이 나의 어떤 부분은 풍족하게 해주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단짝 친구의 집에 놀러 갔던 일이 생각난다. 외동딸에 외국 출장이 잦은 아빠. 친구의 방은 동화책에 나오는 소녀의 방처럼 꾸며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오르골 인형이나 작은 보석함처럼 예쁘고 반짝거리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한동안 내가 그 친구라면, 하고 상상하며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지금 내게는 친구의 유년 시절에 대한 부러움보단 그 친구를 좋아했던 마음과 그리워했던 마음이 더 깊이 남아 있다. 골똘히 생각하고 많이 그리워하면 닿을 수 있다고 믿었던 마음, 내가 갖고 싶은 건 언제나 그 마음이었다.
밤이 유난히 까매지는 계절이면 한 번씩 상자를 열어본다. 하나 둘 꺼내 읽다 보면 유치해 웃음이 터지 다가도 코 끝이 아릿해진다. 특별한 내용이 없어 시시했던 쪽지마저 다시 접어 상자에 넣는다. 그러곤 편지를 써 볼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