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의 말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의 이름은 오득주였다. 얻을 ‘득’에 구슬 ‘주’. 구슬을 얻는다는 뜻의 이름이다.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썩 세련되지는 않지만 곧고 우아한 이름. 부모의 사랑과 바람과 소망으로 빼곡하게 메꿔진 단단한 이름. 왜 이름에 ‘짓다’라는 동사가 붙는지 알 것 같다. 수십 년 굳건히 버텨 줄 집을 짓는 마음의 터에 ‘득주’가 지어졌다.
득주는 어린 내 손을 구슬처럼 꼭 쥐고 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는 내 옷을 차곡차곡 개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 줬고 할머니에게 혼난 날이면 내 손을 잡고 슈퍼마켓에 가서 과자를 사 줬다. 득주 앞에서 하루 종일 재잘재잘하던 나는 그의 빛나는 구슬이었다. 그리고 빛나는 구슬을 받치고 있는 두 손. 그의 우아한 이름을 내 몸에 새겼다.
<바다 수영이 좋은 이유>, 《작고 기특한 불행》, 오지윤, RHK
<바다 수영이 좋은 이유>에는 오지윤 작가가 바다에 갔다 새로 새긴 타투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타투에는 저자가 애정 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고. 글의 결말에는 발도 닿지 않는 먼바다에서 할아버지와 수영을 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할아버지가 있어 안정적인 아이의 환한 웃음을 저자는 자신의 것처럼 기록한다. 이 글 앞에서 아이처럼 기뻤다. 당신에게도 있을 ‘흔하며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손을 내미는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빛나는 구슬 같은 존재가 된다는 건 어떤 걸까. “득주 앞에서 하루 종일 재잘재잘하던 나는 그의 빛나는 구슬이었다.” 라고 쓴 저자가 득주 할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이 나는 부러웠다.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사진으로만 얼굴을 봤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먼 시골에 살아 몇 년에 한 번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기차역에서도 차를 타고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마을. 거기에 닿는 버스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만날 때마다 서먹서먹했다. 외할머니는 서울에서 온 내게 장롱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사탕을 꺼내 쥐어 줬다. 구멍가게 하나 없는 동네에서 사탕 같은 군것질거리는 귀한 거였다. 그런데도 계피나 박하처럼 애매한 맛이라 움추러든 어린 맘을 펴주진 못했다. 남쪽 지방이라 모든 음식이 짜고 매웠다. 입에 맞는 반찬이 없어 끼니마다 고역이었고 화장실이 본채에서 떨어져 있어 소변이 마려운 밤마다 발을 굴렀다. 두 분도 초등학생 때 돌아가셨지만 크게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건 어떤 걸까? 무조건적으로 예쁨을 받는다는 건.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며 펑펑 우는 친구를 보며 속으로 신기해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돈독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 은근히 부러웠다. 내겐 없는 것, 영원히 가져볼 수 없는 감정이자 사랑이다.
어른을 대하는 게 어렵고 불편했던 게 조부모님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색했다. 신혼 때 산에 갔다 힘들어하는 노인을 만났는데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남편이 얼른 가방에 넣어 왔던 귤을 꺼내 건네 드렸다. 어떤 거리감 때문에 다가가길 망설였던 나와 달리 남편은 생각할 새도 없이 자연스레 행동이 나왔다. '이런 걸 잔정이라고 하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은 어려서 조부모님과 함께 산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길에서 마주치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나보다 살갑다.
명절 연휴고 다음 주엔 아버님 생신이 있어 시댁에 다녀왔다. 어르신들이 내 딸을 바라보는 시선엔 넉넉함이 가득하다. 별거 아닌 일로도 칭찬하고 예뻐해 주신다. 할머니의 호들갑에 별다른 반응 없이 새침하게 앉아 있지만 아이의 속마음은 느끼고 있겠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아껴주는지. 조부모의 속 깊은 애정을 경험하지 못한 나는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아기가 생애 초기 조부모와 형성한 애착 관계가 매우 강력하며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조부모는 아이에게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멘토’가 되어줄 수 있다고.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한 발 물러서 있지만 그래서 부모보다 더 너그럽게 아이를 칭찬하고 격려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조부모다. 아이가 부모와 문제를 겪을 때, 혹은 남몰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조부모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건 살아가면서 큰 힘이 될 테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시부모님 손에 자란 아이의 사촌 언니만 해도 엄마와 싸우거나 공부하기 싫을 때 할머니 집으로 피신하곤 한다.
할아버지 생신이라고 아이는 얼마 전부터 노래를 연습했다. 어쩌다 나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빠와 할아버지 생신에 노래를 부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부끄럼도 많고 낯도 심하게 가리는 아이가 가족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연습하는 아이를 열심히 격려했다. 엄마 아빠가 같이 불러주겠다며 부추겼다. 실은 가사도 제대로 못 외운 상태였지만. 한창 노래 부르는 재미에 빠져 있는 아이는 금세 가사를 외우고 리듬을 타며 노래를 불렀다.
마침내 연습해간 노래를 부를 기회가 찾아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큰엄마, 큰아빠, 사촌 언니가 앉아 있는 앞에서 아이는 나와 서서 노래를 불렀다. 안 하겠다고 뺄 줄 알았는데 그런 것 없이 바로 노래를 시작해 놀랐고. 나는 옆에서 장단만 맞췄는데도 사람들 앞에 서 있는 자체로 진땀이 났다. 아이는 꿋꿋하게 노래를 끝까지 불렀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그 순간 아이는 빛나는 구슬 같은 존재가 되었으리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 혼자 집으로 돌아 왔고 남편과 아이는 시댁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기로 했다. 밤이 되자 남편에게서 사진 몇 장이 날아왔다. 사촌 언니와 줄넘기를 하고 같이 목욕을 했다고. 언니가 라면을 먹는다고 해서 할머니가 끓여 주신 라면을 둘이 같이 먹었다고 한다. 그러고도 김밥을 만들어 먹고 둘이 설거지를 했단다. 사진 한 장에는 할머니 맞은편에 사촌 언니와 나란히 앉은 딸아이의 뒷모습이, 또 다른 한 장에는 언니와 같이 싱크대에서 설거지하는 딸이 있다. 웃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면 두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게 그려졌다. 구슬처럼 자기만의 빛을 마음껏 뽐내고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편이 앞에 있으니까. 꾸지람 없이 늘 칭찬만 하고 감탄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할머니 앞에서 종알종알 이야기를 늘어놓는 아이의 기쁜 얼굴을 떠올린다. 발그레진 볼과 들뜬 목소리를.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부모님 말고도 나를 무조건적으로 아껴주는 이가 있다니 그만큼 든든한 일이 있을까.
어린아이가 되어 외할머니 앞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해본다. 녹았다 다시 굳어 모양이 일그러진 사탕을 쥐어 주던 외할머니를. 말없이 웃으며 가만히 내 손을 잡아주던 외할머니 앞에서 나도 구슬이었을까. 녹았다 다시 굳어갈 정도로 아꼈을 사탕과 손녀 주겠다며 장롱 깊숙이에 묻어 두었던 마음이 뒤늦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