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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Oct 10. 2023

소고기 뭇국

세상의 기쁜 일부, 나라는 기쁨





오랜만에 뭇국을 끓이려고 무와 소고기를 사 왔다. 그러고는 몸이 움직이지 않아 냉장고에 넣어만 두었는데 딸아이가 갑자기 물었다. “뭇국은 언제 끓여줘?” 내가 무랑 소고기를 사 왔다고 말했던가. "어떻게 알았어?" 하고 물으니 그냥 먹고 싶어 져서 말한 거란다. 너랑 나랑 마음이 통했나 보다고 유난스레 기뻐했다.




마늘을 다지고 무를 썰었다. 냄비를 불 위에 올리고 참기름을 부어 달군 후 마늘과 소고기를 넣어 볶고. 채 썬 무까지 쏟아 넣은 후 달달 볶다 물을 붓고 끓였다. 무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국물이 깊어질 때까지 뭉근하게 끓여야 맛이 나는 것을 오래도록 끓였다.




딸아이는 어린이집부터 같이 다닌 친구들과 그 아빠들끼리 박물관과 놀이 시설로 체험학습을 다녀왔다. 그중 한 친구와 같이 씻고 싶다며 둘이 떠들썩하게 목욕탕으로 들어간 지 한참. 조잘조잘 꺄르르르,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노래가 흘렀다.




“보슬보슬 비가 와요 하늘에서 비가 내려요

달팽이는 비 오는 날 제일 좋아해

빗방울과 친구 되어 풀잎 미끄럼을 타 볼까

마음은 신이 나서 달려가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달팽이의 하루




언젠가 학교에서 배웠다 길래 불러 달랬지만 사정해도 입도 벙긋하지 않았는데, 바로 그 노래였다. 비 와서 좋은 달팽이처럼 목욕해서 신난 아이들, 빗방울과 친구 되어 노는 달팽이처럼 친구와 목욕해서 너무 즐거운 아이들. 그 마음 고스란히 목소리에 담겼고. 맘이 잘 맞는 친구와는 시키지 않아도 절로 노래가 나오지. 쿵작이 맞아 누가 들을까 하는 걱정은 한 톨도 없이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부엌에서 일하던 손을 놓고 화장실 문 앞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 목소리가 커질수록 내 마음도 콩닥콩닥. 멋진 그림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아이들 노랫소리로 나를 둘러싼 세상이 갑자기 아름다워졌으니. 달팽이와 빗방울과 친구가 되고 풀잎으로 미끄럼을 탄다는 노래를 이토록 맑고 고운 목소리로 부르는 아이들.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기쁨을 기쁨으로 순전히 누리고 있구나. 그러는 사이 아이들 자신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다.




전날에는 가을볕이 아름다운데 해가 기울 때가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청신한 바람이 불고 하늘이 파랬고 걷는 것만으로 기분이 산뜻했지던 날. 발이 닿는 대로 익숙한 길을 한 바퀴 휘돌고 나니 어수선하던 머릿속이 잔잔해졌다. 먼지떨이를 휘두르면 포르르 떠오르는 먼지처럼 팔과 다리를 움직이면 잔 생각들이 포르르 날아간다. 그렇게 툭툭 털어내도 괜찮을 생각들이. 그러면 시야가 말개지고 고개 들어 멀리 내다볼 여유도 생긴다.  




발길이 공원으로 들어섰을 때 저무는 해가 먼 하늘에 금빛 잔상을 퍼뜨렸다. 벤치 위 벚나무 잎사귀는 군데군데 살구빛으로 물들어가고 공원 잔디밭 한가운데엔 오렌지 빛 선명한 코스모스가 불을 밝힌 듯 환했다.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사람들, 아이와 공놀이를 하는 사람, 높은 하늘과 자유로운 구름, 너른 공간을 가로지르는 연 하나. 멀리서부터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저녁의 기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기쁨으로 망막에 맺혔다. 기쁨을 품고 있다 기쁨을 풀어내는 존재들이 세상에는 가득하다고. 세상의 기쁜 일부가 되어야지, 생각했다.




매일 아침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했던 첼리스트가 있다. 에스파냐 출신의 파블로 카잘스. 그는 13살 무렵 바르셀로나의 고악보 가게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발견하고 12년간 홀로 연구한 끝에 세상에 그 음악의 진가를 알렸다. 20세기 첼로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그는 매일 눈을 뜨면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습하며 하루를 시작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날마다 같은 곡으로 연주를 시작하는 일은 하나의 의식 같은데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세상의 기쁜 일부가 되는 일이라고. 연주라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에서 기쁜 일부로 존재하는 거라고. 아이들은 밝게 웃고 뛰어놀며 노래하는 것으로 세상의 기쁜 일부가 된다. 나는, 우리는 어떻게 기쁜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세상에서 내가 될 수 있는 조각은 무엇일까. 어떻게 기쁜 존재들과 온화하게 공존할 수 있을까.




내게 다가오는 기쁨에라도 순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무심한 채 놓쳐버리지 않고 다가오는 기쁨을 환하게 맞이할 수 있다면. 부끄러움 없이 얕잡아보는 일도 없이, 겸허와 넉넉함으로 끌어안을 수 있다면. 말간 그 얼굴 알아채 주면 내게 다가와 소곤소곤 어떤 이야기를 전해줄지 모른다. 기쁨이 기쁨으로 온전할 때 그 안에 가득한 사랑과 슬픔과 아름다움을 와르르 내 앞에 쏟아줄지도. 그것들 채집하여 종이 위에 가지런히 붙여 볼 수 있을까. 상자 안에 곱게 포개어 둘 수 있을까.




나라는 작은 가슴으로 오늘이라는 새벽을 연다. 오늘도 고작 손바닥만 한 사랑이나 실천할 수 있으려나. 손에서 풀어져 나오는 실로 보잘것없는 하나 엮어 볼 수 있을까. 오늘이라는 짧은 실에 구슬 같은 기쁨을 꿰어 보고 싶고. 그러니 긴 산책을 해야겠다. 작은 아이를 품 안에 오래 안아 두고 누군가의 뒷모습을 골똘히 바라도 보고. 가을볕 일렁이는 모서리와 나뭇잎 물들어가는 가장자리를 가만히 쫓아가야지. 나의 자리에 기쁘게 머물며 세상의 일부가 될 것이다. 나라는 기쁨이 될 것이다. 




뭇국이 아니라 꼬마 핫도그에 야심을 더 담았나...




뭇국에 밥을 말아주었는데 아이들이 싱겁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럼 소금을 더 넣어보자며 아이들을 달랬다. 야심 차게 끓인 국이었는데 오랜만이라 맛 내는 법을 잃어버렸나. 밥 먹기 전 내어준 꼬마 핫도그가 아이들 입맛을 뺏어갔나. 친구들이 절반 이상 남긴 국을 딸아이만은 말끔히 비웠다.




빈 그릇 바닥에 사랑이 누워 있었다고 뒤늦게 읽는다. 그것도 사랑의 표식이라고. 뽀뽀도 안 해주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도 않는다고 툴툴거렸는데. 흔한 방식 말고 다른 걸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눈을 닦고 귀를 모으면 뻔하지 않은 사랑이 온다. 기쁨의 구슬 한 개, 또르륵 굴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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