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가는 산책
나만의 아침
새벽 4시,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면 발소리를 죽이고 침실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서재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 작은 등을 밝혀 두고 글을 쓴다. 검은색 표지의 몰스킨 노트에, 하얀 몸에 검은 뚜껑이 달린 빅(Bic) 볼펜으로. 아이가 깰 때까지 글 속에 머무른다. 아이와 남편이 꿈속을 헤매는 사이, 세계가 아직 어둠에 잠겨 있는 사이, 홀로 있다는 느낌 속에서 글을 쓴다. 온전한 나 자신이 되어, 나만의 은밀한 생각 속을 유영한다. 작지만 소중한 아침, 이 시간이 없다면 매일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루 24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 하지만 그 시간을 살아내는 모습은 제각각이다. 세상이 바쁘게 돌아가는 낮 시간에 중점을 두는 이가 있다면 모두가 잠드는 밤과 새벽에 삶의 무게를 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삶의 무대는 아침에 펼쳐진다. 이른 아침부터 정오가 될 때까지 나는 가장 맑고 순수한 상태가 된다. 이 리듬을 유지하려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어느새 익숙해진 감각은 저녁 6시만 돼도 피곤을 몰고 오고 밤 9시면 눈꺼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매일 나만의 아침을 기대한다. 나만의 패턴이 쌓여가는 생활에서 은근한 즐거움마저 느낀다.
이른 아침 아이가 일어날 때까지 완벽한 고요 속에서 내가 되는 시간을 누린다. 아이가 깨면 어린이집에 보낼 준비를 하고, 등원시킨 후 정오까지 독서나 글쓰기에 집중한다. 읽고 쓰는 사이, 아이를 키우느라 희미해졌던 자아가 윤곽을 찾아간다. 글을 쓰면서 내가 원했던 삶에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아이나 남편, 집안일에 송두리째 빼앗기지 않고 내 것으로 떼어놓을 수 있는 요즘, 삶이 꽤나 만족스럽게 느껴지니까.
매일이 쌓여 예술이 된 삶
이 년 전 호주 브리즈번에 살고 있는 동생을 만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우연히 본 전시 광고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마가렛 올리(Margaret Olley, 1923~2011)라는 호주 출신 여류 화가의 전시였다. 광고에 담긴 화사한 꽃과 정물이 어우러진 유화가 눈길을 끌었다. 후기 인상주의 화풍에 여류 화가, 일상의 사물을 따스하고 정감 있는 색채로 그린 그림, 이 모든 조합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A Generous Life’라는 전시 제목 아래 호주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라는 소개글이 적혀 있었다. 일상의 사물로 빚어낸 ‘관대한 삶’이라니. 전시 개막일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전날이고, 미술관은 동생네 집에서 차로 왕복 세 시간 거리의 다운 타운에 있었지만, 이 전시만은 꼭 보고 가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초록색으로 페인팅한 전시실은 꽃 그림으로 덮여 있었다. 회고전 성격의 대규모 전시였다. 꽃과 그릇, 테이블과 꽃, 과일과 꽃 등, 가지각색의 꽃이 캔버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림마다 다 다른 꽃이 그려져 있었지만, 꽃병이나 주변에 놓인 그릇, 테이블, 배경 속 가구는 반복되었다. 꽃 그림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실이나 문간, 침실과 부엌 등 집안의 여러 공간이 그림 속 주제로 변주되었다. 처음엔 풍성한 꽃과 매끄러운 화병이 특별한 물건으로 느껴졌지만 전시장을 돌아보면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
그녀가 화폭에 그린 것은 이벤트의 순간이거나 특별히 갖추어 놓은 사물이 아니라 매일의 일상이며 평범하고 익숙한 물건들이었다. 해 질 녘의 거실, 식사를 준비하는 부엌, 방 한 편의 가구, 그녀가 화병에 꽂았을 꽃과 벽에 붙여 놓은 그림. 날마다 그녀가 바라보았던 집안의 한 구석이 그림 속에 있었다. 매일의 삶이 차곡차곡 캔버스에 담겨 있었다. 화병에 꽃을 꽂고 화병 곁에 놓을 사물을 고심하며 골랐을 화가의 매일을 상상했다. 그림을 중심으로 굴러갔을 매일의 일상, 그리고 그것이 결국 예술이 되는 삶. 삶과 예술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이 예술이 되는 것. 예술은 그처럼 멀리 있지도 거창하지도 않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중심을 둘 것인가
“저는 매일 그림을 그렸어요, 그걸 사랑하니까요. 그냥 그림 그리는 게 좋았어요.”*라고 화가는 말했다. 매일 꽃을 꽂고 그와 어우러지는 정물을 배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은 그녀에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사시사철 다채로운 꽃을 구할 수 있는 환경과 예술가의 미감으로 수집한 가구와 그릇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의 정물화에서 꽃이라는 소재의 특별함보다 일상성과 매일의 반복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화가의 길을 걸은 초창기 그녀 또한 풍경화를 그렸다. 초로에 접어들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그린 거대한 풍경화도 있다. 하지만 파리에서 수학하고 호주로 돌아와 정착한 이후에는 집안에 머물며 정물화에만 몰두했다. 꽃과 화병, 그릇과 과일, ‘still life’가 그녀 그림의 주요 주제였다. 평이한 소재를 반복적으로 그린 작업을 통해 그녀 정물화는 완벽한 구조와 절대적인 안정감, 조화로운 색감을 얻었다. 그녀의 어떤 그림에는 화병에 담긴 풍성한 꽃을 중심으로 오른쪽엔 작은 항아리가 왼쪽엔 접시에 담긴 과일이 낮게 놓여있다. 세 개의 사물은 적당한 간격과 높이로 완벽한 삼각형의 비를 이룬다. 그녀의 그림은 꽃이라는 대상이 지닌 활기와 기쁨으로 가볍게 소비되는 대신 훈련된 미감을 통해 만들어낸 균형과 조화로 우리를 어떤 명상적 상태로 이끈다.
마가렛 올리는 그림을 그릴 때 구성의 중심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어딘가는 솟아오르고 어딘가는 낮추면서 중심을 잃지 않고 깨어 있기 위해 수년간 훈련했다고 한다. 처음 자리를 잡은 사물일지라도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중심을 다잡기 위해 따로 떼어놓거나 치워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중요한 것은 완성된 그림에서의 중심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면서 중심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녀의 삶에서 그림이 갖는 의미도 그랬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지적했다. 남성은 단번에 눈을 닫고 자신의 일에 몰두할 수 있는 반면 여성은 한 눈으로 남편을, 또 다른 눈으로는 아이를, 그러고도 한편으로는 냄비를 지켜보느라 가만히 앉아 그림 그리기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는 일찍부터 철저히, 잔혹할 정도로 자신에게 집중하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집이 무너지고, 갑자기 곁에 있는 사람이 쓰러져도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철문을 내려 닫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살아가는 매일 속에서 중심을 지키고자 애썼던 그녀의 노력이 단순한 꽃 그림에 절대적인 구도의 미를 부여하고, 매일의 삶을 ‘예술’이란 형태로 옮겨 놓았을 것이다.
내 삶의 중심을 잡으며
여성에게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어렵다. 오랜 시간 다녔던 회사를 그만둔 결심에 임신과 출산도 영향을 미쳤다. 잠시 아이에게 삶의 무게 중심을 옮겨 놓자고 생각했었지만 그 일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줄도, 내겐 그 일이 잘 맞지 않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아이는 끝없이 엄마를 찾았고, 집은 치워도 치워도 다시 어지럽혀졌다. 깊고 까만 바닷속에 잠겨 있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내가 알던 나는 사라지고 육아와 가사에 지쳐 무기력해진 낯선 이가 남아 있었다. 나를 되찾고 나를 위해 살고 싶어졌다.
아이가 자라면서 아이와 나 사이에 틈새가 생겼다. 모래알처럼 내 손을 빠져나가던 시간들이 조금씩 잡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엄마 도움 없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었다. 체력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아이가 잠든 밤 나만의 시간을 가져볼까 했지만 엄마 없이 잠들지 못하는 아이의 수면 습관 탓에 같이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얼핏 잠이 들었다 다시 깨더라도 멍한 정신으로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 그러느라 늦게 자고 나면 다음날 어김없이 피곤이 몰려왔고 하릴없이 보낸 지난밤이 원망스러웠다. 아이와 일찍 잠들고 새벽에 일어나는 시도를 해보았다. 초반엔 어린아이가 옆자리가 빈 걸 알아채고 잠에서 깨는 바람에 다시 침대로 들어가 아이를 재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운 좋게 아이가 깨지 않는 날도 있었다. 한두 시간이라도 명료한 정신으로 새벽의 고독에 빠져들고 나면 온전히 나로 머무는 감각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게 어찌나 달콤하던지 조금이라도 더 일찍 일어나고 싶어 절로 눈이 떠졌다.
새벽 글쓰기로 나를 되찾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계획하고 일궈가면서 내 삶이 나를 위해 굴러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당장 글쓰기로 뭐가 되거나 수입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도 삶의 중심을 글쓰기에 맞추려고 애쓴다. 글을 쓸 때 비로소 나로 존재하는 것 같고, 그때 느끼는 몰임감과 기쁨이 나를 긍정하게 해 주니까. 그러니 원하는 삶을 위해 제한된 시간과 자원을 재구성하고 적절히 배치하는 일은 중요하다. 마가렛 올리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삶의 중심에 놓고 그 외의 것에는 단호하게 눈을 닫을 줄도 알아야 한다. 크고 작은 일들이 오가고 예기치 않은 사건이 생기기도 하는 생활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면 마음의 중심을 찾으려는 소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제는 아이와 집안일에 내 시간 전부를 내어주지 않는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고, 남편과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육아와 집안일을 분담하니 예전보다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일상의 빈틈을 인정하면서 삶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애초에 완벽한 글이 없듯 완벽한 삶도 완벽한 집도 없다는 걸 안다. 아이와 집안을 돌보던 시간을 쪼개서 나 자신을 챙기다 보면, 저절로 아이와 집은 나와 사이좋게 균형을 잡으며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
매일 반복하는 것에서 중심을 찾고 꾸준히 작품으로 창작했던 마가렛 올리를 따라 내 일상의 중심에 무엇을 둘 지 고민한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중심이 어디인지 잊지 않으려 했던 그녀처럼 삶의 중심이 내게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창 밖으로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오늘도 내 삶의 중심을 다잡아 본다.
*<Margaret Olley> Barry Pearce, The Beagle Press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