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머무는 곳
한번 마음에 들었던 곳을 다시 찾아가는 편이다. 장소와 나 사이에도 관계가 생기고 시간을 들일수록 그 관계는 깊어진다. 장소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둘 쌓이면 어느새 이야기가 된다. 한 장소와 이야기로 묶이고 싶다.
영월은 그런 곳 중 하나다. 아이 여섯 살 무렵 여름휴가차 들렀다 동강을 따라 바위 절벽이 이어진 수려한 풍광에 매료되었다. 숙소 근처 강가엔 깎아지른 듯 높은 절벽이 있었고 강에 면한 아랫 부분에 검은 문이 달린 듯 동굴이 이어졌다. 강을 건널 수 없으니 가볼 수 없고 그런 조건 때문에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강을 따라 이어지는 산세 또한 유난히 둥글어 마음씨 좋은 거인들이 누워있는 것 같았다. 낯선 고장이지만 그 거인들이 나를 푸근하게 반겨 주는 것 같았달까. 우연히 들른 천문대에서 별 보기까지 하면서 언제든 다시 와도 좋겠구나 생각했다.
다음 해 늦가을 영월을 다시 찾았다. 동굴을 마주 보는 강변을 산책하고 천문대를 가는 게 계획의 전부였다. 그랬는데 천문대가 공사로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문대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산 위로 올라가면 평소보다 많은 별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렇게 산으로 올라갔던 밤엔 파도처럼 산등성이가 끝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다.
이번 가을에도 영월을 다시 가보고 싶었다. 작년에 못 갔던 천문대를 방문하는 걸로 충분할 것 같아 숙소를 예약하고 날짜를 비워두었는데, 천문대 방문이 예약제로 바뀌고 이미 예약이 꽉 찬 상태라 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천문대도 못 가는데 거기까지 가서 뭘 하나(서울에서 편도 3시간 거리이니 가깝다고 할 순 없는 곳이다). 고민에 잠겼다 검색해 보니 단종 유배지가 단풍이 빼어나다는 정보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주변 유적지에 대해 검색해 본 적이 없었다. 단종 유배지라니, 이번엔 거길 다녀오자 생각했다.
숙소 근처 놀이터에서 놀다 느지막이 점심을 먹고 청령포로 이동했다. 가을볕이 어찌나 따뜻한지 겨울이 아니라 여름을 향해 되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는 뒤로는 높은 산이 서 있고 삼면은 강으로 둘러싸여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다. 건너편에서 바라보니 마치 동그란 섬 같았다. 물길에 둥글려 졌을까. 청령포 주변을 휘도는 강폭은 넓지도 않은데 그 물길이 누군가를 고립시켰다니. 진실은 얕은 물에도 쉽사리 덮여버리는 미약한 것인가보다.
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삼촌 수양대군의 압력에 왕위를 넘기고 말았던 단종은 결국 영월로 유배를 당한다. 청령포에 유배되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수양대군(세조)의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단종의 삶이 애달파서였는지 단종이 살았던 집 주변을 에워싼 소나무들은 그 집을 향해 잔뜩 구부러져 자란다. 그 중에는 단종의 슬픔을 보고(觀) 들었다는(音) 수령이 600년인 ‘관음송’이 있다. 높이 솟은 소나무가 숲을 이뤄 여름에도 볕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다.
청령포 안쪽에는 노산대와 망향탑이 있다.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해질녘마다 올라 서울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노산대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돌을 쌓았다는 망향탑을 둘러 보았다. 높은 곳에 올라 숲을 내려보니 따사로운 가을볕이 나무들 사이로 빗금을 그리며 떨어졌다. 숲의 정령이 머물 듯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가득했지만 단종의 삶이 지닌 애잔함이 베일처럼 청령포에 드리워 모든 것이 더욱 애틋해 보였다. 슬픔과 시름에 잠겨 날마다 그것들을 바라보았을 한 사람의 시선이 곳곳에 베어있는 듯 했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가면서까지 갖고 싶은 권력이란 무엇일까. 그런 탐욕을 부리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 걸까.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았을 단종의 마음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이 숲의 나무들은 모든 것을 보고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커다란 나무들이 쓰러질 듯 구부러져 자라는 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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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의 소설 <단 한 사람>에는 나무인 신이 등장한다. 그 신은 소설 속 주인공의 꿈에 나타나 ‘단 한 사람’만을 구하도록 한다.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주인공은 오직 한 사람만 구할 수 있고 잠에서 깨면 구하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여 그는 나무는, 신은 왜 한 사람만을 구하라고 하는지 질문한다. 그리고 소설 속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그 나무는 너무나도 오랜 세월 존재했다. 그동안 엄청나게 많은 생물이 나타났다가 멸종했고 진화했으나 도살되었다. 돌로 만든 무기로 동물을 사냥하고 무리 지어 이동하며 빠른 속도로 다른 생물을 몰살시키던 인류는 순식간에 핵폭탄과 우주선을 만들었다.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를 학살하고 자연을 파괴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면 과연 인류라는 종을 돕고 싶을까. 살리고 싶을까. 나무가 주는 생명은 은총이 아닐 수도 있다. 삶이라는 고통을 주려는 것인지도. 그러나 삶은 고통이자 환희. 인류가 폭우라면 한 사람은 빗방울, 폭설의 눈송이, 해변의 모래알. 아무도 눈이나 비라고 부르지 않는 단 하나의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것은 금세 마르거나 녹아버린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어쩌면 그저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보고 있다고. 생명체라는 전체가 아니라, 인류라는 종이 아니라 오직 너라는 한 존재를 바라보고 있다고.
232~233쪽 <단 한 사람> 최진영, 한겨레출판
폭우 속에 빗방울 하나, 폭설 속에 눈송이 하나, 해변의 모래알 하나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빗방울 하나 하나가 모여야 폭우가 된다. 빗방울 하나가 없으면 폭우도 존재할 수 없다. 무언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선 단 하나, 하나가 있어야 한다. 무언가를 존재하기 위해 시작되는 하나. 그렇기에 존재 자체로 의미가 생긴다. 단 한 사람. 한 사람도 그렇다. 존재 자체로 모든 걸 존재하게 만든다. 한 명 한 명은 의미를 낳는 존재다.
소설 속 나무 신을 떠올렸다. 관음송은 단종의 나무 신이 아니었을까. 그에게 너를 보고 있다고 알려주기 위해 그렇게 구부러져 자란 게 아닐까. 그리워하는 대상을 향해 나무는 허리 굽혀 자란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청령포의 소나무들은 단종을 귀애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보호하고 싶어 있는 힘껏 기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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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는 그리운 기운이 가득했다. 고향을 그렸던 한 사람의 애타는 그리움과 애처로운 그를 감싸고 싶었던 나무들의 그리움. 그곳에서는 흠뻑 그리움에 젖어들면 좋겠다. 우리가 기억해주는 것으로 누군가는 평안한 잠을 잘 것이다. 마땅한 슬픔으로 누군가를 기억해주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일이다.
끝을 생각하면 한 번 뿐인 지금이 더욱 소중해진다. 따사로운 가을볕이 내리는 자리에 세 식구 나란히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연두빛에서 노란빛으로 서서히 물들어 가는 나뭇잎이 바르르르 몸을 떨었다. 그 앞에서 아이는 노래를 부르다 춤을 추다 까르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서로에게 단 한 사람. 바라보는 중에도 그리워지고 마는 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