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킹하는 할머니가 꿈
시간과 성의를 들이고, 강렬하고 복잡한 감정을 경험했던 일은 소중한 것이 된다. 좋기만 한 것도 아니고 싫기만 한 것도 아닌, 절대 버릴 수 없는 무엇. 애틋하게 좋아하는 일은 그런 걸 테다. 내겐 베이킹이 그런데 누군가 인생에 그런 일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라고 말해주었다.
베이킹은 실행하기 전 도구와 재료를 꺼내 계량할 생각에 번거로움이 앞서 그만두거나 미루게 되는 일 중 하나. 그런데도 아이와 베이킹을 하기로 약속하면 어길 수 없어 몸이 움직이고, 그렇게 시작하고 나면 별거 아닌데 싶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언젠가 했던 약속을 몇 번 미루다 엊그제 쿠키를 만들었다.
쿠키 반죽은 재료를 계량해 푸드 프로세서에 드르륵 갈기만 하면 되니 간단. 반죽 하나에는 초코칩을 넣어 초콜릿 쿠키를, 다른 반죽에는 호두 조각을 넣어 호두 쿠키를 만든다. 옆에서 재료를 나르고 저울을 보던 아이는, 반죽에 노른자만 넣고 남은 달걀흰자를 보고 설탕을 넣어 휘저으며 자기만의 쿠킹에 빠져든다.
“머랭 쿠키 만들어 볼까?” 나의 제안에 순간 봄날의 햇살처럼 환하게 빛이 번지는 아이의 얼굴. 아이가 휘저어 살짝 거품이 일어난 흰자에 전동 거품기를 꽂고 세차게 휘핑을 해준다. 호기심에 두 눈을 반짝이는 아이의 손에 거품기를 쥐어 주고 설탕도 조금 더 넣어 본다. 금세 거품이 부풀어 볼 가득 차오르고 뽀얗고 단단한 상태가 된다. 그걸 짤주머니에 담아 오븐 팬에 마음껏 짜 보라고 아이 손에 들려주면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작은 똥, 큰 똥, 기다란 똥, 하면서 저 혼자 키득거린다.
쿠키 반죽과 예기치 않게 생긴 머랭 반죽까지 오븐에 넣고 타이머를 맞춘다. 서서히 피어 오른 달콤한 향기가 기다리는 마음으로 스며들어 몽글몽글 구름 한 덩이를 키운다. 그 작은 구름 한 덩이가 얼마 전의 자그마한 수고를 싹 지워주는 지우개가 되고.
조급한 우리는 갓 구워 뜨거운 쿠키를 손에 들고 호호 불어가며 먹는다. 호호- 불고 한쪽 모퉁이를 살짝, 또 호호- 불어 저쪽 모퉁이를 살짝. 뜨거움이라는 얼얼한 감각에 달콤함이 무디게 느껴지는데도 아이는 맛있다며 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런 네 얼굴이 더 맛있어 하하하 웃다가도, 진짜 맛있네 하며 또 하나를 손에 들고 만다.
한 김 날리고 예쁜 접시에 담아 우아하게 먹는 대신 주방 아일랜드 식탁 위 식힘망 위에 간신히 옮겨 놓은 쿠키 조각들 옆에 나란히 서서 오물조물 요란하게 먹는다. 어떡해, 너무 맛있어, 또 먹어야겠어, 엄마 몇 개 째야?, 너는?, 더 먹을까?, 나는 초콜릿 쿠키, 엄마는? 나는 호두 쿠키, 와앙-
아이와 보내는 어떤 시간은 짧고도 강렬해 아득하게 길다. 게으른 나를 움직이게 하고, 재미없는 나를 웃긴 사람이 되게 하고, 무심한 나를 다정하게 한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반짝임이 와글와글 쏟아져 나온다. 지루한 시간에 설탕과 소금, 버터를 더해 단짠단짠,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하고.
좋아했던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애틋하게 좋다. 십 년 즈음 취미로 배웠고, 몇 년은 일로써 진하게 기쁘고 슬픈 맛을 보게 했던 베이킹은. 내게는 한 시절, 어떤 마음, 낭만적인 꿈, 달콤한 시, 나른한 노래이며 마법 약, 파란 깃털, 작고 단단한 조약돌이기도 한.
언젠가 친구가 내게 고백했던 귀여운 꿈이 내게도 꿈이 될 때가 되었나. 작고 예쁜 케이크와 타르트, 쿠키를 굽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던 꿈. 베이킹을 일로 하느라 지쳐있던 그때엔 그런 것도 꿈이 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무표정한 일상에 나만의 설탕과 소금, 버터를 더해 와글와글 반짝거림을 더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호호호’ 웃으며 생활에 달콤한 맛과 향을 더하는, 베이킹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