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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망했다

오늘도 글쓰기 모임에 갑니다

by 춤추는바람




“글을 쓰는 삶이란 용기와 인내, 끈기, 공감, 열린 마음, 그리고 거절당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기꺼이 혼자 있겠다는 의지도 필요하다. 자신에게 상냥해야 하고, 가리개 없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고, 사람들이 보는 것을 관찰하고 버텨야 하고, 절제하는 동시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기꺼이 실패해야 한다.”

<계속 쓰기 : 나의 단어로> 대니 샤피로 지음, 한유주 옮김, 마티


이번 글은 망했다. 글친구들이 써 온 글을 읽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나는 뻔한 글을 쓰고 말았다고. 또 실패했다고.




*




이 주에 한 번 같은 주제로 여섯 명이 각자 글을 써서 만난다. 동일한 주제로 매번 다채로운 글들이 탄생한다.


이번 주제는 ‘나의 습관’이었다. 수현님은 좋아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반복해서 보는 습관에 대해 썼다. 본 걸 또 보는 행위에는 ‘아는 맛’에 기대 안락과 위안을 찾는 심리가 있다고. 글은 수십 번 반복해 본 ‘프렌즈’라는 드라마로 이어졌고 드라마 속 어딘가 미흡한 인물들이 현실 속 불완전한 주변 사람들 같다고 했다.


“이처럼 6명의 주인공은 매우 입체적이어서, 미운 구석과 사랑스러운 구석을 모두 지니고 있다. 꿀밤을 먹이고 싶을 만큼 얄미울 때도 있지만 결국엔 미워할 수 없이 안아주고 싶다. 그것은 마치 일상생활 속의 우리들과 같다. 며칠 전 대학 베프들과 모인 날 "Y는 맨날 늦는데, 가끔 내가 늦는다고 하면 정말 너그럽게 천천히 오라고 해서 그게 너무 좋아"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단점이 있는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_수현


좋아하는 드라마를 반복해서 보는 습관에서 ‘아는 맛’으로, ‘프렌즈’라는 드라마에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나아가는 글. 개별 글감의 모서리가 빈틈없이 맞아떨어졌다. 걸리는 데 없이 물 흐르듯 읽히는 글은 짜임새 좋은 글의 표본 같달까. 수현님 특유의 재치와 유머는 간직한 채 다정한 위로까지 더해졌다.


섬하님 글은 또 어떤지. ‘까치 소개’라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제목으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글을 열어 보니 ‘~요’로 끝나는 경어체 문장이 등장했다. 화자인 까치가 자신을 소개하는데, 날아다니는 까치가 아니라 섬하님의 오랜 습관인 ‘까치발’을 의미했다. 독특한 제목과 문체로 단 번에 독자를 사로잡았다.


까치와 설날, 그리고 어린 시절 에피소드로 시작되는 글은 섬하님답게 사랑스러웠다. 까치라는 동물이 서사를 풀어 교훈적으로 마무리하는 한 편의 우화같았다. 오랜 시간 ‘까치발’로 걸어 엉덩이 근육이 없어졌고 그로 인해 자세 교정을 위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슬픈 결말은 글을 읽는 사람에게 깨달음의 기회를 제공했다.


“또 얼마나 잘못 심어진 사소한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라나 지금의 저를 만들었을까요. 깊숙이 땅을 파내어 그 속을 들여다본다면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우선 무성하게 뒤덮인 잡초와 줄기를 전부 쳐내야겠어요. 진짜 내 몸 하나 온전히 만들며 살기란 쉽지 않네요.”

_섬하


까치발의 습관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누구나 잘못된 습관 한 두 개는 지니고 산다. 그런 습관으로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허다하고. 습관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내 몸 하나 건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진짜 내 몸 하나 온전히 만들며 살기란 쉽지 않네요.”라는 문장 하나로 저자의 어려움을 공감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적확하게 쓰인 문장의 힘이란 이런 걸 테다.


나무밑단풍님의 글은 또 다른 면에서 빼어났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 비상구와 완강기를 점검하는 습관이 있다. 안전에 민감한 습관은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라는 사회적 이슈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의 습관에서 시작해 자연스레 중대한 사회 이슈로 나아갔다. 말하기 어려운 주제라 생각했는데 나무밑단풍님의 글은 어렵게 쓰인 글도, 다가가기 힘든 글도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말해 보려는 노력이 느껴졌다. 그 진심이 읽는 이의 마음에 추 하나를 더했다.


“상처받은 '우리 모두'라는 표현에 정곡이 찔렸다. 그날 그 장소에 가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고 안도하기에 급급했던 옹졸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공공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나의 안전만 지키면 된다고 당당히 믿었던 태도가 부끄러웠다. 동시에 마음 한편 그들을 향한 미안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안전은 사유(私有)할 수 없는 것임을, 모두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일이 결국 나를 위한 일임을 너무 큰 비용을 치르고 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_나무밑단풍


나무밑단풍님의 발표 후 모두가 숙연해졌다.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자주 잊어버리고 말았던 일, 아프다는 이유로 들추기 두려워했던 문제. 그럴수록 더 이야기하며 사회 구석구석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그녀의 글은 알려주었다. 그 일이 타인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




지난 2주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친구들의 글이 일취월장했다. 지난번과 확실히 다른 지점에 있었다. 글은 단 번에 나아지지 않지만 계속 쓰다 보면 점핑의 순간이 오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들에겐 지금이 점핑의 순간이다.


똑같은 주제로도 고유한 시선으로 개성 만점의 글을 써 오던 사람들이지만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았다. 도입부가 지나치게 길다거나 결론이 급작스럽다던가. 에피소드의 나열에 그쳐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거나. 그랬는데 그 모든 아쉬움을 완전히 씻어내는, 혼자 보기 아까운 글이 탄생했다. 마음속으로 브라보를 외쳤다. 브라보! 브라보! 너무 좋다고 백 번을 말해도 부족했다.


친구들의 발전을 목격하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다. 계속 쓰는 일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증명. 쓰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로 가게 된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는 일. 그러니 나도 조금 나아졌을지 모른다는 위로.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헛되지 않았구나. 계속 써 보자고 용기를 북돋는다.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 자랑스럽다. 글쓰기의 어려움에 주눅 들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쳐내는 친구들이 멋지다.


평소보다 공을 들였냐고 묻자 수현님은 조금 더 오래 고민하며 썼다고 답했다. 역시. 어떻게 써야 할지, 어디를 채워야 할지, 스스로 조금씩 알아채고 있는 단계에 접어든 걸까. 그러면 글을 쓰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요기 조금 저기 조금 이렇게 저렇게 바꿔 보고, 기껏 쓴 문단을 통으로 날려 보기도 하면서. 마지막 문단을 도입부로 옮기는 시도도 하고 글에 딱 맞는 제목도 붙이면서. 창의적인 요리사처럼 글감을 가지고 놀면서 무언가를 만드는 재미를 느끼는 것. 그렇다면 당신도 글쓰기에 빠진 거다.


친구들이 글의 맛이라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 쓸수록 개운하고 후련한 기분. 한 편의 글을 끝맺으면 잘 쓰든 못 쓰든 뿌듯한 마음이 들고 어렵게 한 편을 마치면 글을 쓰기 전과 조금 다른 자리에 도착한 기분이 든다. 친구들이 그 기분에 젖어들고 있나 보다. 그래서 조금 더 잘 쓰고 싶어 지고 저절로 글쓰기에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단계로 나아가나 보다.


모임의 멤버들이 진정한 글쓰기의 세계로 입성했다. 글쓰기의 맛을 알았으니 이 친구들과 오래도록 함께 쓸 수 있겠다. 그건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를 지닌 친구들과 만남을 지속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같이 있는 사람들과는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데 좋은 사람들을 계속 만날 수 있다는 건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고. 친구들이 나와 전혀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어 좋다. 답답한 내게 다른 기울기와 틈새를 보여 줘 고맙다. 그런데도 내 글의 좋은 점만은 지치지 않고 말해 준다.


“이 부분에 대해 더 써 보세요, 더 듣고 싶어요”


이런 말을 들으면 얼른 돌아가 글을 고치거나 다른 글을 또 쓰고 싶어 손 끝이 근질근질해진다. 그 요구는 이상하게 인정과 칭찬으로 들린다. 더 쓸 수 있다는, 더 써 달라는 응원이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건 당장 잘 쓴 글 한 편이 아니라 서툴더라도 계속 써 나가는 힘인데 모임에 갈 때마다 그걸 얻어 온다. 내 글도 괜찮다는 자신감, 그 에너지로 계속 쓴다.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대니 샤피로가 언급한 ‘내구성’이라는 게 자라고 있을까.


“한 번만이 아니라 자꾸만, 평생을. 언젠가 사뮈엘 베케트(Beckett)는 이렇게 썼다. “시도했고, 실패했다. 상관없다. 다시 하기, 다시 실패하기. 더 잘 실패하기.” 그러려면 위대한 편집자 테드 솔로토로프(Ted Solotoroff)가 내구성(endurability)이라 불렀던 것이 필요하다.”

<계속 쓰기 : 나의 단어로> 대니 샤피로 지음, 한유주 옮김, 마티


내 글은 실패했다. 수현님의 글처럼 완벽한 짜임새를, 섬하님처럼 독특한 문체와 스타일을, 나무밑단풍님처럼 진솔한 목소리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 미지의 생각이라는 동굴로 한 발 더 내디디려 시도하며 용기를 냈던 순간을 나만은 알고 있다.


시도가 매번 성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글이 막히는 지점에서 펜을 놓아버리는 대신 더듬더듬 나아가보려 했던 경험은 즐겁고 신선했다. 희미했던 생각의 미로에서 하나의 길을 찾아낸 기분이랄까. 간신히 매듭을 지은 문장과 문단이 글 속에 있다. 서툴지만 정성을 들인 문장을 친구들은 알아봐 주었고. 시도했기에 실패도 만들 수 있었다.


다시 시도할 것이다. 더 낫게 실패하기 위해. 쓰지 않는 대신 계속 쓰면서, 더 멋지게 실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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