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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Nov 13. 2024

최선이 낙하

지금이 최선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달 11월이다. 10월부터 어찌나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지 날짜가 하나씩 넘어가지 않고 둘씩, 다섯씩 묶음으로 넘어가는 기분. 자꾸 쫓기는 마음이 되어 버린다.


유난히 피로감이 크게 느껴지기 때문일지 모른다. 체력이 급속히 떨어져 일정 시간 집중하고 나면 더 이상 무얼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시력도 나빠졌다. 오후가 되면 두 눈에 막이 덮인 듯 시야가 뿌예진다. 무리한 날은 눈이 빠질 것처럼 아프고. 최근엔 왼쪽 어깨에 통증까지 생겼다. 오래 앉아 있으면 어깨부터 타고 내려오는 통증으로 손이 저린다. 하나둘 몸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알람, 노화의 신호. 몸과 정신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몸이 아프면 정신까지 위축되어 버린다.  


여전히 읽고 싶은 책이 많고 꾸준히 글을 써서 더 나은 글을 쓰고 싶은 욕심도 있는데. 그러니 움츠러드는 정신에게 다른 신호를 보낸다. 나이가 들며 체력이 감소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야. 남은 체력을 더 잘 써야 한다는 알람인 거야. 더 소중한 것, 내가 좋아하는 일에 시간과 체력을 사용해야 해. 불필요한 것을 잔뜩 쥐고 있는 건 아닌지,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자. 그런 것들 미련 없이 버리고 단순해지자.


그럴수록 속도를 경계하고 느려지는 쪽으로 기울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천천히 숨을 들이 마신다. 그러면 다른 게 보인다. 핸드폰을 열어 내게 없는 것을 동경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지금 내 앞에 있는 좋은 것을 천천히 음미하게 된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 동네 서점에 주문해 두었다 책이 왔다는 연락에 받으러 갔다. 노란 책 표지에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 실린 책, 여행 에세이다. 그리운 이가 여행지에서 내게 띄운 편지라도 받은 양 괜스레 뭉클했다. 책을 쓰기 위해 애썼을 시간과 다듬고 다듬어 담았을 진심 같은 게 떠올랐다. 책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한 사람이 자신을 깎고 깎아 최선의 모습으로 담아 놓은 하나의 자화상. 나의 모습을 내어놓는 일은 부끄럽고도 기쁜 일이라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데. 책은 용기라는 단단한 뭉치. 당신이 내어준 용기, 감사히 받을게요.


영수증 필요하세요? 아니요. 봉투에 담아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책방 아저씨는 항상 같은 질문을 건네고, 나는 늘 같은 답을 돌려드린다. 질문과 답이 같은데도 아저씨는 빠짐없이 확인한다. 오늘은 간단명료한 그 대화 후에 아저씨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눈가에서 번지려다만 희미한 기운이 내가 아는 아저씨의 미소 전부였는데. 두 눈이 기울고 입꼬리가 올라가 얼굴 군데군데에 주름이 잡히는 웃음을 본 건 처음이다. 없던 문 하나를 발견한 기분. 커다란 나무 아래 초대받은 듯 마음이 활짝 펴진다.


없던 문을 발견하고 먼 곳에서 온 편지를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 색이 짙어진 나무들이 몸을 세우고 나를 반긴다.


나무들은 최선의 색에 다다랐다. 노랗게 붉게, 갈빛과 주홍빛으로 물든 잎사귀들이 길 위에 쌓였다. 아직 최선을 향하는 잎들은 머리 높은 곳에서 색을 뽑아내고 있다. 저무는 해가 꼬리처럼 긋고 간 연분홍빛 노을이 구름에 스며들어 나무들의 배경이 되었다. 눈앞의 장면이 찬란하게 아름다워 한 장의 잎사귀처럼 몸을 떨었다. 영원을 걷는 사람처럼 순간을 걸었다.


그러면서 알았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소진된다고 모든 걸 잃는 건 아니라는 걸. 젊음을 잃은 대신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을 얻었구나. 시력은 약해지고 힘은 소진되어 가지만 다른 면에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최선이 낙하임을 알고 있는 나무들처럼, 나도 최선을 향해가는 중일까. 작은 돌멩이의 마음이랄까, 낙하하는 나뭇잎의 마음이랄까, 그런 마음 하나 주워 주머니에 담았다.  






* <볕뉘의 순간들>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 작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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