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북클럽 모임에 갑니다
한낮의 맑은 빛, 한 조각의 타르트와 카푸치노, 당신의 눈물과 웃음, 장난스레 말할 때 콧잔등에 생기는 주름, 울프를 떠올린 시간과 고양이의 웅크린 몸. 그 오후가 꿈처럼 아련한 건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은 시간을 살고 있어서인가 보다.
연말을 앞두고 북클럽 사람들을 만났다. 대상포진으로 오래 앓느라 한동안 만날 수 없었던 H님을 보아 반가웠다. 워낙 마른 체구에 작은 얼굴을 가진 H님인데 그사이 더 야위고 작아진 것 같아 안쓰러웠는데 그런 내게 오히려 H님이 괜찮다며 씩씩하게 웃어주었다. 아팠던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나도 더 기운을 내야 할 것 같았고, 실제로 더 기운이 솟는 기분이었다. 내 안의 앓던 마음이 단숨에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올 한 해 각자가 삶에서 크고 작은 일을 통과했다. L님은 타국에서 한국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는데 또다시 타국으로 터전을 바꾸게 되었고 C님은 카페를 열어 기쁘고 힘든 과정을 지나 일을 마무리하는 지점에 다다랐다. H님은 큰 병을 앓았다. 내겐 책을 낸 것과 몸의 급격한 쇠락을 마주한 일이 있었나. 짧게 문장을 적어보는 이 순간엔 그럼에도 모두가 무사히 한 해를 건너왔으니 다행이지 싶고.
파스타 집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검색한 카페의 이름이 ‘울프’길래 혹시 하는 마음으로 가보니 입간판에 버지니아 울프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책 모임을 하는 우리가 찾아온 카페가 울프의 정신을 품은 공간이라니 우연한 선택이 기다렸던 인연처럼 반가웠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대로에 면한 통창으로 겨울의 깨끗한 빛이 들이쳤다. 낡은 LP판으로 가득 채운 벽면과 소소하게 덧댄 크리스마스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의 흔적이 내려앉아 적당히 닳은 나무 탁자와 군데군데 붙은 고양이 사진과 엽서, 메모들에서 다정한 기운이 느껴졌다. 잔물결처럼 흐르는 음악과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어우러져 작은 활기를 형성했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단숨에 잊혔다.
마감이 임박한 일을 끌어안고 있어 외출이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사람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만나길 잘했구나, 어떻게든 밖으로 나오길 잘했구나 싶었다. 얼굴을 보고 두 눈을 봐야지만 느낄 수 있는 온기와 실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눈 오는 날 강아지 마냥 신이 났다. H님과 C님이 지닌 유머와 재치는 납작 눌린 쿠션을 툭툭 털어 공기를 불어넣듯 마음을 가뿐하게 해 주니까.
커피와 타르트를 주문하고 테이블에 마주 앉아 선물을 나누었다. H님이 손글씨로 적어온 엽서를 읽다 L님은 울음을 터뜨렸다. 내게 주신 H님의 엽서에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글쓰기에 대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언급이 있었는데. 그처럼 L의 마음으로 세심하게 길을 내는 H님만의 고운 문장이 또 다른 엽서에도 적혀 있었을 것이다. C님은 운영하시는 카페의 로고가 찍힌 머그를 곱게 포장해 오셨다. 우여곡절 끝에 카페 문은 닫게 되지만, 귀한 경험과 배움, 추억을 만들어준 공간이라 우리와 함께 기억하고 싶다고 하셨다. C님이 부여한 의미로 이미 소중한 컵을 건네받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 공간이 컵에 담긴 듯 묵직했다.
겨울의 햇살이 들이치는 창가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울고 감탄했다. 서로를 들어주느라 탁자 가운데로 한껏 몸을 기울이고서. 그러느라 겨울이라는 것도 잊었다. 창밖으로는 카페에서 돌보는 길고양이들이 무게감 하나 없는 나른한 걸음걸이로 오고 갔다. 어느새 살짝 열어둔 창틈으로 들어온 줄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어깨 옆 창틀에 인기척도 없이 엎드렸고. 시간이 고양이의 잠처럼 흘렀다. 잠시 봄이었다.
이런 일상이 아주 오랜만인 것 같아 조금쯤 어리둥절했는데. 해야 할 일로 빽빽한 날들을 건너면 넉넉한 괄호 같은 시간이 주어진다는 걸 잊고 있었다. 일상이 유난히 고맙게 다가왔다. 안팎으로 어수선하고 불안한 날들이라 더 그랬다. 눈앞의 일에 애면글면하다가도 정치 상황에 생각이 미치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으니.
봄날의 고양이 잠처럼 평온한 시간에 머무는 동안엔 모든 시름이 잊혔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이 내 곁으로 다가와 또 다른 까만 고양이를 등에서 엉덩이까지 손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가볍게 통통통 두드려주었다. 이 아이는 애교가 많아 사람의 손길을 기다려요, 하면서. 그 손길은 아기가 잠에 빠져들길 바라는 엄마의 토닥임처럼 가볍게 도타웠고 리듬을 품고 길게 이어졌다. 바라보는 나의 영혼도 두드림을 받는 듯 통통통, 통통통, 가지런해졌고.
한낮의 맑은 빛, 한 조각의 타르트와 카푸치노, 당신의 눈물과 웃음, 장난스레 말할 때 콧잔등에 생기는 주름, 울프를 떠올린 오후와 고양이의 웅크린 몸.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이 봄날의 낮잠처럼 우리 곁에 머물며 이렇게 속삭였다. 쉼표 같은 시간이 오면 우리 곁의 귀엽고 따숩고 아름다운 것들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일상이 축복이지. 일상엔 소중한 게 참 많지. 그러니 하루빨리 모두의 곁으로 고양이 잠 같은 평온이 돌아가길, 겨울의 깨끗한 빛을 태평하게 쬐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길. 그 기반을 흔드는 불안이 오래가지 않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고.
12월의 남은 날들, 부디 안녕히 건너요.
희망은 우리의 바람대로 먼 곳으로부터 오고 있을 거예요.
헤어지는 길 서로를 향해 몇 번이고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