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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가지

발견하는 생활

by 춤추는바람




산책길에서 죽은 나무를 보았다. 나뭇가지에 마른 잎사귀가 남아 있었는데 초록물이 빠져 미색이 되어버린 잎들이 꽃처럼 보였다. 주변을 에워싼 키가 크고 기둥이 두꺼운 나무들에 비하면 그 나무는 가지가 가늘고 크기도 아담했다. 뿌리에서부터 가늘게 분리된 너댓 줄기가 고운 선을 그렸다. 연초록빛으로 잎사귀를 키워가는 나무들 사이에서 흰색에 가까운 잎을 달고 선 나무가 조형물 같았다. 모든 것이 살아 숨 쉬는 듯한 숲에서 그것만 가짜 같아 아름다웠다.


죽은 게 맞을까? 잎이 초록색이 아니라고 죽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어느 날 잘 쉬었다는 듯 연둣빛 싹이 돋아날지 모른다. 나무가 본래의 색을 되찾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어떤 시간을 건너야 할까?


그 질문이 내게 돌아왔다. 나는 어떤 시간을 건너고 있을까? 머지않아 오십이 된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내도 괜찮은 걸까. 가만히 쉰을 맞아도 되는 걸까, 걱정이 앞설 때가 있다.

마흔 이후로는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나이를 산다. 초등학생 때는 중고등학생이 된 나를, 고등학생 때는 대학생이 된 나를 상상했다. 대학생 때는 졸업 이후를 상상했지만, 가장 멀리까지 떠올려 본 게 고작 서른이었다. 그때는 서른이 너무 어른 같아 까마득했는데. 어느덧 서른을 지나 마흔을 건너 쉰을 향하고 있다니. 내 나이인데도 이 나이가 낯설고 어색하다. 서른 이후로는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어려웠다.


상상할 여유 없이 어떤 일들이 밀어닥쳤고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할머니’가 된 나는 어떨까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마흔다섯의 나, 쉰일곱의 나는 떠올려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이제 ‘할머니’의 기준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언제부터를 할머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마흔으로 사는 일이 힘든 건지 모르겠다. 한 번도 상상으로 연습해보지 못했던 삶이라서. 밑그림도 예시도 없었으니 노화라는 신체의 신호와 내가 맞닥뜨리는 상황에 당혹스러워지나 보다.


불쑥 텅 빈 채로 답답한 마음이 찾아온다. 그게 무언지 알 수 없다. 가끔은 이미 오래 산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그런데도 아직 살아야 할 시간이 살아온 것 이상 남았다는 사실이 무겁게 마음을 짓누른다. 키우고 돌보고 책임져야 하는 일의 끝없음. 그러다 혼자 남으면 내 몸 하나 감당하기 힘든 노인이 되어 있으려나. 그런데도 마음은 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뒤처진다. 아이의 마음 위로 어른이라는 몸만 입은 것 같다. 언제쯤이면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진짜 어른은 어떤 사람이지? 마흔여덟에 여성인 어른은 어떤 사람일까? 그 여성의 삶이란 어떤 걸까? 어디서 배운 적 없고 모델이라고 앞세워 놓은 대상도 없다.


십 대, 이십 대, 삼십 대까지만 해도 그 나이란 이런 거고, 이런저런 일을 하는 거라는 표본 같은 게 사회에 존재한다. 배우고 경험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독립하고…. 정답은 없고 저마다 차이는 있을 테지만, 표본이라는 게 때로는 정해진 틀 같아 답답할 수 있지만, 참고 목록은 숙제하는 사람에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마흔 이후로는 교과서나 참고서 없이 숙제해야 하는 기분이다. 더군다나 전업주부에 프리랜서의 삶에 관한 참고서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어떤 날엔 이런 투정이 흘러나온다. 왜 아무도 이런 나이가 된다는 걸 알려주지 않은 거야? 몸은 허약해지는데 해야 할 일은 많고 그래서 마음은 작아지는 나이. 담대해지기는커녕 막막해서 두려움이 수시로 몰려오는 나이. 통 큰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속 좁은 꼰대가 되기에 십상인 나이. 익숙해지면 쉬워진다는 진리도 삶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도 매해가 처음처럼 우리에게 닥친다. 학교 가기 싫었던 어린 시절의 그 마음으로 매일을 맞을 수도 있다. 삶에 통달이란 없다.


인간은 구축되는 존재라고 했다. 삶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십 대, 이십 대, 삼십 대를 지나면 어느 정도 내가 형성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갖춰진 나로 남은 생을 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삼십 대까지 나를 제대로 만들지 못해서일까? 매해 우리는 새로운 나이를 맞이하기 때문일까? 사십 대에도 나를 새롭게 재구축하느라 애를 먹었는데 쉰을 바라보는 요즘 다시금 나를 구축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수시로 휩싸인다. 또다시 흔들린다. 삶 앞에서 휘청이는 이 마음이 무언지 알고 싶다.


사십 대 후반에서 오십 대 초반의 여성의 삶. 그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일과 질문, 그 흔들림을 통과하는 자기만의 방법을 만드는 일. 그에 대한 예시나 자습서 같은 게 필요하다. 더 많은 삶의 레퍼런스가. 수명이 연장되어 예전과 다른 역할이 더해졌다는 게 문제지만, 그런데도 참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나 자신과 삶을 잘 다독이는 방법, 그런데도 기쁘게 시간을 건너는 법을 터득하고 연습하고 발명하고 싶다.


모른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한결 마음이 나아진다. 내 나이와 이 시기의 삶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렵다는 걸 확인하니 무얼 해야 할지도 알 것 같아서다. 내게 다가올 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느라 움츠러들었구나, 오지 않은 미래를 앞서 내다보았구나 깨닫는다. 그럴수록 지금, 내 앞의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도. 미래를 걱정할 시간에 오늘 일을 끝내고, 지금 유효한 기쁨을 찾아야 한다.


지난 주말에는 겨울 외투를 빨아 넣었다. 날이 맑고 바람이 가벼웠던 어떤 오후엔 겨우내 입었던 니트를 세탁기에서 울 코스로 돌렸다. 빨래를 마친 니트는 가지런히 개켜 수건 위에 쌓은 뒤 깨끗한 수건을 덮어 발로 자근자근 밟았다. 차곡차곡 쌓은 니트가 발바닥 아래로 포근하게 닿았다. 한 발 한 발 번갈아 움직일수록 종이 한 장씩을 빼내듯 발아래서 얇은 공간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조금 단단해졌다. 옷 위에 덮었던 수건을 걷으니 반반해진 니트들이 잠자코 누워 있다. 바람이 드나드는 베란다에 널어 말렸더니 반나절 만에 보송함을 되찾았다.


4월의 빛과 바람을 머금고 따듯하게 폭신해진 니트를 접어 서랍장에 넣었다. 돌아올 겨울을 위해 온기 한 줌을 챙겨둔 기분이다. 문득 이처럼 사소한 일을 챙기는 것도 마흔아홉이 될 나를 준비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날이 추워져 걱정이 앞설 어느 날, 몇 계절 전에 미래의 나를 위해 몸을 움직였던 내게 고마워지지 않을까. 보드라운 니트를 입고 안도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알 수 없는 나이를 대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계절마다 반복되는 일을 성실히 해내기. 나만 아는 삶의 구석에 정성을 숨겨 두기. 모르는 것투성이지만, 서른에도 마흔에도, 몸에 잘 맞는 옷을 입고 건강한 끼니를 챙기고, 깨끗한 이불을 덮는 일은 작지만 커다란 기쁨이었고 지친 내게 절실한 위안이었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러니 오십에도 그럴 거라고 믿을 수 있다.


산책길의 마지막 구간에서 작은 연두색 잎사귀로 촘촘하게 하늘을 뒤덮은 단풍나무 아래에서 바람이 잎사귀를 가볍게 훑고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물결의 표면이나 얇고 가벼운 직물처럼 가장자리가 이어진 잎사귀들이 부드럽고 섬세하게 흔들렸다. 그 사이로 저녁의 햇살이 연한 금빛으로 스며들었다. 주변으로 새의 노랫소리가 아련하게 번졌다. 하루치의 수고에 대한 보상처럼 순수한 기쁨이 나를 채웠다. 마음이라는 텅 빈 금고가 찰나에 충만해졌다. 그렇지, 나는 내게 가장 적확한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만은 기억하고 싶다. 쉰의 내게도 내게 필요한 기쁨을 찾아줄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이처럼 순수하게 기쁜 순간을 모으며 매일을 사는 것도 내가 아는 삶을 건너는 방법의 하나다. 나이 들어가는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투성이지만, 내게 필요한 한 가지는 무언지 잘 알고 있다. 날마다 딱 맞는 기쁨 하나를 발견하는 일. 나만이 아는 세상의 기쁜 표정을 놓치지 말고 수집하자. 나는 그것을 살아감의 책무로 받아들인다. 살아있음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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