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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케이크의 성패를 가르는 한끗

현상 유지가 제일 어렵다던 선생님의 말...오늘도 어제처럼 노력합니다

by 춤추는바람



예전에는 특별한 날 롤 케이크를 많이 선물하지 않았느냐는 말을 들었다. 지금처럼 디저트 종류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의 일이다. 그때엔 동네 제과점에서 파는 롤 케이크도 고급 선물로 통했다. 그 말에 내가 좋아하는 롤 케이크가 떠올랐다.


한때 유행했던 일본 오사카 지방의 특산품인 ‘도지마롤’이다. 단면이 달팽이 집 같은 케이크가 아니라 동그랗게 가장자리를 감싼 제누와즈(빵 시트) 안을 생크림으로 가득 채운 케이크다. 생크림이 듬뿍 든 롤 케이크의 부드럽고 가벼운 식감 때문에 나는 이걸 ‘구름 롤’이라고 부른다.


구름 롤을 만드는 과정은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제누와즈와 생크림만 준비하면 끝. 달걀을 충분히 휘핑한 뒤 가루 재료를 가볍게 섞어 폭신한 제누와즈를 만든다. 크림은 생크림에 크림치즈를 넣어 풍미를 진하게 한다. 크림의 핵심은 바닐라 빈(향신료)이다. 바닐라 빈으로 유제품이 많을 때 생길 수 있는 느끼한 맛과 안 좋은 향을 잡아주고 고급스러운 향을 더한다.


제누와즈를 폭신하게 만들고 생크림의 균형만 잡아주면 케이크 만들기는 거의 성공한 셈. 하지만 이 간단한 케이크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남았다. 바로 케이크 말기. 김밥 말기가 쉬운 듯 은근히 어렵듯 케이크 말기도 숙달되면 쉽지만, 초보에겐 어렵다. 자칫하다 속도와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케이크 옆면으로 길게 금이 생겨 버린다. 금이 간다고 맛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디저트는 눈으로 먹는 즐거움도 큰 음식이지 않은가.




과정은 쉽지만 정말 어려운 한 가지


몸으로 하는 일은 부지런히 반복해야 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운동선수와 악기 연주자들이 하루도 연습을 거르지 않고 작가들이 훈련하듯 날마다 글쓰기를 반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반복해서 연습해야 익힌 감을 유지라도 할 수 있다. 실력을 높이려면 어제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하고, 실력을 유지하려면 어제만큼의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한번 익힌 감도 계속하지 않으면 잊히기 십상이다.


5년 넘도록 롤 케이크를 말지 않았으니 나의 손이 감을 지키고 있을까. 다행히 제누와즈를 말려고 하지 말고 제누와즈 아래 깔린 유산지를 잡아당긴다는 느낌으로 말라던 선생님의 말씀만은 잊히지 않았다.



IMG_8488.JPG ▲ 구름 롤 케이크 생크림을 듬뿍 넣어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케이크. 그 사이 감을 잃어 케이크 겉면에 금이 가고 말았다. © 김현진


구름 롤은 제과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전, 회사 다니며 취미로 베이킹을 하던 시절에 배웠다.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그때엔 지금처럼 디저트 가게가 흔하지 않아 가로수길이나 홍대처럼 특정 지역을 찾아가야 수준 있는 디저트를 맛볼 수 있었다. 당시 가로수길의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서 ‘아름다운 케이크’라는 이름의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진행하신 선생님은 말수가 적고 행동거지도 조용한 남자 파티시에셨다. 베이킹을 하는 과정에서 재료와 도구를 다루는 손이 섬세하고 꼼꼼했는데 디저트 샵을 운영하기 전에 보석 디자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이 만들어 내는 케이크는 흔히 볼 수 없는 형태와 디자인으로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선생님은 언제나 말없이 케이크를 만드셨고 서두르거나 흥분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다. 재료를 다루는 손의 철두철미함과 조리대와 도구를 깨끗이 관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선생님의 케이크가 아름다운 만큼 제과에 임하는 태도가 내겐 감동적이었다.


고요한 분주함, 부드러운 카리스마, 강압적이지 않은데 느껴지는 단호함. 그런 뉘앙스가 선생님의 행동과 태도에 그림자처럼 머물렀다. 돌이켜보면 그때 보았던 선생님의 모습이 내 안의 무언가를 자극했던 것 같다. 디저트가 단순한 음식을 넘어 예술적 표현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해 주었다. 선생님처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도구로 디저트를 선택해보고 싶었다.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 중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나를 일깨워주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수업에는 가게를 내거나 파티시에를 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들이 왔고 실습이 끝나고 그날 만든 케이크를 시식할 때면 가게 운영이나 직업에 관한 질문이 오갔다. 선생님은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셨다. 지속해서 메뉴를 개발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현상을 유지해야 하는데, 유지만으로도 버겁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가게는 꽤 알려져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철마다 새로운 케이크를 개발해 선보이고 있었다. 나날이 성장하는 모습이었기에 현상 유지만으로 벅차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의아했다. 겸손해서 그렇게 표현하시나 보다 생각했다.


가게를 직접 운영해 보고서야 선생님 말씀의 진위를 알게 되었다. 오늘의 가게를 어제의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가게 문을 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이다. 몸이 아프거나 집에 일이 생기면 연차라도 쓸 수 있는 회사원과 달리 자영업자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가게를 지켜야 하는 고충이 있다.


판매하는 제품의 퀄리티를 지키는 것만큼이나 가게의 상태(청결과 외관)를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모두를 관리하여 한결같게 하기. 더 나아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날마다 힘에 부쳤다. 그러니 선생님은 커다란 매장을 지키며 메뉴를 개발하고, 그러면서 수업까지 진행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쏟으셨던 걸까.




오늘도 어제만큼 노력했는지


유산지를 깔고 시트를 올리고, 크림을 펼쳐 바른 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바닥에 깔아 둔 유산지를 당기듯 밀며 유산지의 장력을 사용하기. 말로 설명하기도 어려운 이 과정은 1초도 걸리지 않는데, 성패를 가른다.흡-.


아니나 다를까. 들어 올린 케이크가 순식간에 떨어지면서 금이 갔다. 아쉬운 대로 재빨리 말아 수습했지만, 감을 잃었다는 것만은 명백했다.


현상 유지가 가장 어렵다던 선생님의 말씀을 되새긴다. 우리가 매일 노력을 기울이는 대부분의 일은 더 나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유지라는 건 고작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준과 상태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일이다. 잘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더 잘하길 욕심내기 전에 지금의 수준을 이어가고 있는지, 오늘도 어제만큼 노력했는지부터 돌아보는 건 어떨까.


문득 선생님이 그리웠다. 어디선가 여전히 지금을 지속하기 위해 고요히 성실하고 계시겠지. 가게를 유지하고자 분투했을 매일의 노력이 이제야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런데도 자식처럼 키워낸 ‘아름다운 케이크’의 훌륭한 레시피를 나누어주셨으니 선생님의 마음이 케이크보다 아름답다. 선생(先生)이란 나보다 앞서 살아 배운 걸 가르치는 사람을 일컫지만, 그 앞섬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데서 생기는 걸 테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연재됩니다.

https://omn.kr/2dxpy




* [글 굽는 오븐] 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다음 연재일은 6월 1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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