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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 쌓여야 맛있는 타르트처럼

과거가 쌓여 닿은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해지는 비밀

by 춤추는바람


잊지 않고 챙겨 먹는 과일이 있다. 초여름의 살구와 여름의 아오리사과, 늦여름의 무화과가 그렇다. 6월 초에서 중순까지 이 주 동안만 먹을 수 있는 신비 복숭아와 지금이 한창인 산딸기도 때를 놓치면 맛볼 수 없는 과일. 이런 과일을 틈새 과일이라 부른다.


틈새 과일을 애정하는 건 우리 곁에 잠시 왔다 사라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산딸기나 살구, 아오리사과나 무화과 같은 과일은 맛보다 모양이나 색, 과일이 지닌 이미지 때문에 아낀다. 저녁놀의 고운 빛깔을 품은 살구나 청춘의 풋풋함을 머금은 아오리사과는 손안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 한 시절과 소중한 기억을 불러낸다.


꽃이 피지 않아 무화과(無花果)라는 이름이 달린 무화과는 열매 안에 꽃을 숨겼다. 꽃이 없는 게 아니라 씨방이 자라 열매의 껍질이 되고 그 안으로 꽃이 모여 우리가 먹는 과실이 된다.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꽃은 동그란 방 안에 자기만의 미로를 만든다. 그걸 먹고 음미하며 피지 않는 꽃처럼 세상의 논리와 다르게 진행되는 세계도 있음을 헤아린다.


앙증맞은 모양의 산딸기는 주로 그림책에서 주인공을 신비로운 모험으로 이끄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빨간 열매를 따 먹다 길을 잃고 오두막을 만난다거나, 숲 속 동물과 마주친다든지. 산딸기는 하나의 메타포다. 뜻밖의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다. 우연히 동네 과일 가게에 들른 날, 산딸기가 눈에 뜨였다.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냉큼 사 들고 왔다.


겹이 쌓여 더 맛있어지는 산딸기 타르트, 당신이라는 세계


IMG_8517.JPG ▲ 산딸기 타르트 층층이 쌓여 다채로워진 타르트 © 김현진


잘 익은 산딸기는 생과만으로도 맛있고 플레인 요거트와 같이 먹어도 좋다. 단맛이 강한 건 아니지만 새콤한 맛이 매력적이고 톡톡, 씨가 씹히는 식감도 재미있다. 산딸기나 체리처럼 산미가 있는 과일은 다크 초콜릿과도 잘 어울린다. 상큼한 단맛이 다크 초콜릿의 쓴맛과 어우러져 균형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초콜릿 무알뢰(moelleux)를 채운 타르틀레트(tartelette)를 만들어 산딸기를 올려 먹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모양이 작고 예쁜 산딸기는 특별한 장식 없이 그 자신으로 타르트를 돋보이게 만들어 줄 것이다.


타르틀레트(tartelette)는 일반적인 타르트보다 크기가 작은 타르트를 말한다. 타르트(tarte)는 버터와 밀가루, 아몬드 파우더를 섞어 만든 빠뜨(pâte:밀가루 반죽)를 타르트 틀에 깔고 크림이나 과일을 채워 굽는다. ‘무알뢰(moelleux)’는 프랑스어로 ‘달콤한, 부드러운’의 뜻을 지녔다. 초콜릿 무알뢰는 달걀흰자와 아몬드 파우더를 섞은 반죽에 초콜릿을 녹여 넣은 부드럽고 달콤하면서 촉촉한 필링이다.


빠뜨를 밀대로 밀고 타르틀레트 틀에 깔아 모양을 잡아주었다. 틀의 바닥과 벽면이 만나 직각이 되는 부분을 반죽으로 꼼꼼하게 채워야 모양이 예쁜 타르트가 완성된다. 이때 빠뜨의 두께는 지나치게 두껍거나 얇아서도 안 된다. 지름 20cm인 원형 틀의 경우 반죽의 두께로 0.4~0.5cm가 적당하다고 배웠다. 제과 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의 파티시에 선생님이었던 파비 셰프는 타르트가 작아지면 빠뜨의 두께도 얇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주방에서 홀로 반죽을 밀어 성형하고 완성된 반죽을 냉동실에 넣는 과정 중 귓가에서 셰프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빠뜨는 조금 더 얇게, 손가락으로 만지며 두께를 감각하기, 반죽이 녹아 흐물거리지 않도록 손놀림은 빠르게, 오븐에서 반죽이 부풀지 않게 포크로 피케(piquer:포크로 반죽을 찔러 공기가 지나다닐 구멍을 내주는 작업)도 해야겠지. 그래도 즐겁게 하라고, 즐거운 게 중요하다는 파비 셰프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흘러나왔다.


한 사람은 그가 그때까지 만난 사람과 세계의 총합이라고 했던가. 내가 익힌 것들은 내 안에 저절로 생기거나 혼자 습득한 게 아니라 누군가를 통해, 어떤 세계를 거쳐 왔다. 그것들을 품고 있기에 우리는 혼자인 순간에도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 보고 듣고 배우느라 서로에게 스며들었던 사람들의 흔적과 함께다.


흔적들 쌓여 겹이 되었다. 과거라는 겹, 시간이라는 겹. 나이가 들면서 내 안의 겹도 얇은 책 한 권 정도는 된 것 같다. 부모님과 친구들, 선생님과 선후배, 동료들이라는 겹, 날마다 통과했던 장면과 사건, 풍경이라는 겹. 무언가를 바라볼 때 표면만 보이지 않고 주변과 너머로 사람과 장소, 기억과 시간이 그림자처럼 드리운다. 과거의 시간이 웅덩이처럼 고인다.


한 사람의 시선엔 현상을 너머 그가 겪은 온 삶이 담긴다. 그가 만난 모든 이의 자취가 머문다. 통과한 시간의 더께가 앉는다. 그걸 지나 여기 닿았으니 내 앞의 순간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안의 겹을 알게 되면 타자 안의 겹과 내 앞에 놓인 사물의 겹도 헤아려보게 된다. 당신이 당신이 되기까지의 겹, 한 장의 접시가 접시가 되기까지의 시간, 한 권의 책이 책이 되기까지의 노력. 내 앞의 모든 것이 소중해진다.


파비 셰프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타르트를 만든 시간이 따듯했다. 셰프를 못 본 지 오래되었지만 언제든 내 안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아서. 나와 파비 셰프가 만났을 때 단지 두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안에 겹이 된 여럿의 사람과 세상이 마주쳤다는 신비를 발견해서. 사람과 사물, 세상이 품은 겹을 들춰 볼 수 있다면 나라는 사람의 시선 안에 더 많은 사람, 더 깊고 넓은 세상을 담아 볼 수 있겠다.


IMG_8536.JPG ▲ 산딸기 타르트 층층이 쌓여 다채로워진 타르트 © 김현진


어느새 산딸기 타르트에도 층이 생겼다. 바닥의 바삭한 빠뜨, 거기 담긴 부드러운 초콜릿 무알뢰, 그 위로 얇게 펴 바른 산딸기 잼과 윗면을 덮은 산딸기 열매. 층층이 쌓인 재료들의 조화로 맛과 식감, 풍미가 다채로워진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산딸기라는 메타포, 당신 앞의 메타포


식사를 마친 저녁, 만들어 두었던 타르트를 꺼내자 남편과 딸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이 목소리도 내 몸에 쌓이고 있겠지. 언젠가 다시 산딸기 타르트를 만들 때엔 "산딸기 좋아!" 하는 딸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 것이다.


한동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데 몸을 사렸는데 용기 내어 만나야겠다. 심심한 빠뜨 같은 내게도 초콜릿 같은 매력이 있는 사람, 산딸기처럼 톡 쏘는 상큼함과 재미를 지닌 사람을 만나면 새로운 겹이 생길지 모른다. 겹겹이 쌓여 도톰한 당신을 책장처럼 넘겨 보다 보면 말이다.


산딸기 타르트를 만들다 이런 깨달음에 닿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역시나 산딸기는 메타포였다. 당신의 주방과 냉장고, 혹은 책상과 옷장, 눈앞의 장면에는 어떤 메타포가 있을까. 당신 앞의 커피 한 잔에는 어떤 겹의 시간이 채워졌을까. 삶의 메타포일지 모를 그것과 너머의 시간을 잠시 바라보자.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됩니다.

https://omn.kr/2e52s



* [글 굽는 오븐] 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다음 연재일은 6월 30일입니다.

읽고 응원해주시는 작가님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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