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만들기 좋은 계절, 과정을 즐기는 법을 배웁니다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모리 준이치 감독, 하시모토 아이 출연, 2015) ‘여름’ 편은 장마에서 시작한다. 코모리라는 작은 마을은 산자락 아래 자리하고 있어 비가 오면 산을 타고 내려온 구름과 안개에 덮여 습도 100%인 상태가 된다. 벼농사를 짓고 텃밭 작물을 키우는 주인공 이치코는 일을 마친 후 땀으로 젖은 옷을 빨아 널지만, 며칠 동안 옷은 마르지 않는다.
이치코는 특단의 조치로 거실에 있는 난로를 켠다. 열기로 집안의 습기를 날려보려는 심산이지만 무더운 여름에 난로라니, 그 열기는 어쩌나 싶어 영화를 보던 와중에 나도 모르게 ‘흡’하고 숨을 참았다. 그 순간 이치코의 당찬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장마 따위에 질까 보냐."
주인공에게 장마에 지지 않는 법이란 난로를 켜 습도를 잡고 덥고 습한 환경을 이용해 빵을 굽는 일이다.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 부풀려야 하는데 발효에 적당한 온도와 습도는 25~28도, 75~80% 정도다. 여름엔 특별한 장치 없이 실온에서도 발효할 수 있다.
시골의 오래된 목조 주택에 사는 주인공에겐 난로가 오븐이고 난로를 땐 날은 빵을 구울 절호의 기회. 덥고 습한 날씨에 울상이 되어 버리는 대신 빵 굽는 즐거움을 선택한 이치코는 밀가루에 이스트를 섞고 발효와 성형을 거친 반죽을 난로에 넣는다. 과정에 집중하느라 더운 줄도 모른다.
불편해 보이는 시골 마을에서 농사짓고 밥 해 먹는 게 전부인 영화 속 주인공의 일상이 지루하거나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단순하게 꾸려가는 생활에서 이치코는 일과의 모든 과정에 집중하는 듯 보인다. 번거로워 보이는 농사일과 집안일도 이치코의 손을 거치면 낭만으로 바뀐다. 정성을 들여 자기만의 기쁨을 짓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이치코의 삶에 잔잔하게 흐르는 기쁨이 화면 밖으로도 가느다랗게 흘러나와 어느새 그의 삶이 부러워진다.
인생이란 결국 과정의 연속 아니던가. 하루하루, 달과 달, 해와 해, 생활이 반복된다. 그 과정을 즐기려면 단순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많은 것에 신경과 에너지를 뺏기면 금세 피로해지고 마니까.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선별해 삶을 담백하게 만들고 거기에 정성을 들이며 자기만의 기쁨을 찾아가기. 인생을 즐기는 비법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여름은 빵 굽기 좋은 계절
더운 여름은 무얼 하기보단 하지 않는 게 좋은 계절이다. 키우고 자라고 울창해지느라 열을 내는 자연을 바라보며 계절과 시간이 하는 일을 감상하는 게 우리의 몫일 테다. 발효를 거치는 제빵에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무얼 하기보다 잠자코 기다리며 감상하는 태도, 시간에 기댈 줄 아는 자세 말이다. 시간이 반죽에 가하는 무정형의 방식을 허용하는 것이 빵 만들기의 비결 아닐까.
만드는 이의 손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지 않고 공기와 온도, 바람과 햇살, 그날의 기분까지, 그 모든 게 기묘한 방식으로 빵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마치 영원히 풀리지 않는 함수식을 푸는 기분인데 답이 없는 게 답인 함수식이다. 답을 구하려 하지 않는 대신 이것저것 다양한 변수를 넣어보는 것만이 규칙인 식.
그런데도 빵을 만들 때면 몰랑몰랑한 반죽을 만지는 사이 내 마음도 어루만져지는 기분이다. 빵을 만드는 시간은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 영화 ‘이상한 나라의 폴’에서처럼 현실과 다르게 시간이 흐르는 제3의 공간 같다. 각을 잡지 않아도 되는 유연한 빵, 정해진 틀 없이 부풀고 팽창하는 반죽, 빵이 생성되는 시간은 세상의 논리나 속도에서 조금쯤 빗나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반죽은 부풀고, 제멋대로 무언가는 생긴다. 폴의 친구 찌찌(봉제인형)의 마술봉처럼 가만한 시간이 반죽을 바꿔 놓는다.
그처럼 논리나 이해로 완전히 닿을 수 없는 시간이 존재하고, 거기에서는 저만의 방식으로 빵이 부풀어 오른다는 게 나를 평온하게 한다.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져 겸손해지고 모르는 것이 많다는 깨달음 덕분에 호기심을 되찾는다.
6월부터 된 더위가 시작된 여름, 집안엔 더위와 습기가 가득하다. 혼자 있는 낮엔 에어컨을 켤 수도 없어 선풍기 하나로 버틴다. 그런 날엔 빵을 구우면 좋겠다. 별다른 도구 없이도 내 앞에 가득한 열기와 습기가 빵을 넉넉하게 부풀려 줄 테니까.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이상한 빵의 나라를 열어 볼까.
과정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빵 만들기
여름이니까 감자와 옥수수가 떠올랐다. 마트에는 햇감자가 매대에 올라오기 시작했고 쪄 먹는 포슬포슬한 감자란 여름의 별미 중 하나. 톡톡 터지는 옥수수 알갱이를 먹는 일은 또 얼마나 재미있게. 감자와 옥수수를 넣어 빵을 만들어 보자! 그 생각에 내 입에서도 으름장이 흘러나온다.
"더위 따위에 질까 보냐."
발효기가 없는 대신 반죽기가 있으니 이스트, 강력분, 소금, 설탕, 실온에 맞춘 우유와 달걀, 버터를 넣어 반죽기를 돌린다. 반죽기 안에서 매끈하게 한 덩어리가 된 반죽은 실온 상태에서 50분 정도 발효시킨다.
부피가 두 배 정도 부풀고 반죽을 손가락으로 눌렀을 때 천천히 올라오면 발효가 잘되었다는 의미. 그다음 한 덩어리의 반죽을 소분해 공처럼 빚어 10분간 휴지 시킨다. 휴지를 거친 반죽은 밀대로 밀어 편 뒤 으깬 감자와 옥수수 적당량을 올린 뒤 그걸 감싸주도록 성형하고. 성형이 완료되면 다시 2차 발효에 들어간다. 2차 발효는 40~50분 정도.
발효된 반죽은 아기의 궁둥이 같기도 여름 하늘의 두터운 구름 같기도 하다. 몰랑하고 촉촉하고 한없이 보드랍다. 그런 빵 반죽을 만질 때면 마음도 그처럼 변한다. 아기 궁둥이를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고 두터운 구름을 손안에 올린 듯 낯설고도 신비롭다. 몰랑한 반죽을 손안에 넣어보는 일은 빵 만들기라는 과정 안에서만 마주칠 수 있다. 1시간 반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기에 그 순간이 더 귀하게 다가온다.
그처럼 빵 만들기는 결과보다 과정의 즐거움을 알려준다. 결과물을 얻는 끝에서보다 변화하는 반죽의 상태를 지켜보는 과정에 기쁨이 있다고. 노릇하게 빵이 구워져 나왔을 때의 기쁨도 작지 않지만 내겐 발효된 뽀얀 반죽, 그 희고 둥글고 한없이 부드럽고 유연하면서도 탄력적인 과정의 세계가 더 매력적이다. 과정 중에 스치는 찰나의 기쁨을 위해 헌신하는 일이 우리를 충만하게 해 준다는 것도 이상한 빵의 세계에서 발견한다.
이번 여름엔 가능한 한 빵 굽는 시간을 늘려보고 싶다. 잠잠히, 가만히 흐르는 시간의 함수, 빵이 빚어지는 무정형의 시간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 일찍 시작된 폭염과 연장된 장마에 지지 않으면서 여름의 과정을 즐겨보겠다는 마음도 거기에 덧붙인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연재됩니다.
* [글 굽는 오븐] 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다음 연재일은 7월 28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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