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기억을 담은 복숭아 타르트
십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남편과 두 달 남짓 유럽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통해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갈지 모른다고 기대했다. 일주일 이주일, 유명한 미술관과 관광지, 남들이 좋다는 카페와 장소를 찾아다닐수록 헛헛해지면서 조바심이 났다. 눈앞의 아름다운 그림과 건물, 맛있는 음식이 건네는 기쁨도 잠시, 좋은 것도 계속 보니 물렸다. 지속되는 무엇, 내 안에 깊이 새겨질 무엇을 찾고 싶다는 갈망이 솟았다.
여행 기간의 절반이 지나 한창 더위가 기승일 무렵, 여정은 피렌체에 닿았다. 하루는 저녁 식사 후 숙소 근처를 산책하다 소박한 성당이 있는 광장에 다다랐다. 광장 주변에는 소규모의 동네 식당이 늘어섰고 가게 바깥 광장에 면한 공간에 식탁들이 놓였다. 식탁은 저녁 식사를 하러 나온 동네 주민들로 만석이었다.
여기저기 걸터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유연하고 나른한 선율을 흘리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레코드 판처럼 광장은 온통 둥글고 부드러운 기류로 충만했다. 완전히 기울지 않은 저녁의 태양이 부려낸 빛으로 사람들의 실루엣이 금빛으로 일렁였다.
광장의 한 편에 앉아 편안하고 유쾌한 얼굴로 여름 저녁을 만끽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순간, 내 안에서 이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런 장면 하나로 충분한 거야!’ 그 저녁은 ‘완벽한 여름날’의 한 장면으로 내 안에 남았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더 많은 곳을 돌아보겠다는 욕심을 접고 느리게 걸었다.
기록적인 더위가 시작된 탓도 있었다. 달고 긴 낮잠을 자다 저녁 무렵 일어나 작은 광장에서 회전목마를 탄 게 전부인 날도 있었고. 이탈리아의 피서객들 틈에 끼어 근처 섬 마을 바닷가로 수영을 다녀온 날도. 물속에 들어가 헤엄치다 밖으로 나와 자갈밭에 누워 맥주를 홀짝 거리며 책을 읽었다.
여름을 느긋하게 보내는 법을 익힌 여행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수록 좋아지는 계절이 여름이라는 걸 태어나서 처음 알았다. 돌아보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여서 가능했다. 믿을 수 있는 동반자가 곁에 있어 낯선 곳에서도 느슨하게 나를 열 수 있었다.
여름이 좋아졌다, 복숭아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때문에
그즈음 나와 남편 손에는 못생겼지만 달고 향긋한 납작 복숭아가 들려 있었다. 동네 마트를 가면 쉽게 구할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해 대여섯 개에 3유로 정도였다. 납작 복숭아를 사 옷에 슥슥 문질러 닦고 한 입 베어 물면 여름이 사랑스러워졌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나와 삶은 떠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여름의 맛을 알게 되었고 일상을 여행처럼 사는 법도 조금쯤 익혔다. 그해 가을 선물처럼 아이가 찾아왔고 복숭아를 많이 먹었던 여름을 기억해 뱃속의 아이를 슝슝이(복숭아에서 숭아로, 그러다 슝슝이로 바뀐)라고 불렀다. 그 뒤로 여름은 복숭아와 남편과 그 해의 가장 맛있는 복숭아를 찾는데 공을 들이는 계절이 되었다.
여름과 복숭아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 부모님과 여름휴가를 보내는 열일곱 소년 엘리오(티모시 샬라메)는 아버지의 연구를 돕기 위해 미국에서 온 손님 올리버에게 끌린다. 매 순간 그의 말과 행동을 민감하게 감각하면서 엘리오는 그를 향한 감정에 빠져든다. 그런 엘리오의 모습이 여름의 태양처럼 눈부시다.
영화에는 소년에서 청년의 기로에 선 엘리오의 순수하면서 연약한 내면의 상징물로 복숭아가 등장한다. 엘리오 내면의 순수함과 연약함은 엘리오가 올리버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두려움에 지지 않고 내보이는 힘이기도 하다. 자신이 아닌 세계를 기꺼이 끌어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강인함과 자신감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팔딱이는 순수함과 연약함이다.
최근 재개봉한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다시 보았다. 여름 이탈리아 전원의 풍경, 문학과 예술의 풍성한 인용, 엘리오네 가족이 머무는 여름 별장의 인테리어, 책과 음악이 어우러진 삶,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는 깊이 있는 대화, 첫사랑과 첫 경험, 성장통. 몇 년 전 스크린 앞에서 나를 황홀하게 했던 요소들이 여전히 좋았다.
그때도 귀를 기울였지만 잊히고 말았던 몇몇 대사가 다시금 귀에 박혀 내 안에 스파크를 피어 올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거다.
"강이 흐른다는 의미는 모든 것이 달라져서 두 번 만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변화함으로써 오히려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올리버가 읽던 책 사이에서 엘리오가 찾은 메모에 적힌 문구로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과 그에 대한 해석이 담겼다. 변한다는 게 덧없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대상이 자신을 지속하는 방편이라는 의미다.
첫사랑의 강렬한 경험을 통과한 엘리오는 이전의 그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을 통해 환희뿐만 아니라 고통까지 겪지만 그 변화로 그는 성장하고 내면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해보고자 크게 부딪힌 뒤 그의 세계는 확장되었으리라. 한 세계를 뚫고 나온 그는 그럼에도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변해야만 한다. 변함으로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 상실과 변화야말로 우리를 우리 자신이 되도록 돕는다.
변화하면서 내가 된다
십 년 전 피렌체와 그 일대를 돌며 납작 복숭아를 먹던 시절로부터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그때의 홀가분한 자유를 떠올리면 지금의 나는 아이와 남편과의 생활을 꾸려가며 작은 세계에 머무는 듯 느껴진다. 그래서 나를 잃은 것 같은 상실감에 휩싸였던 적도 있다. 영화 속 대사를 떠올리면 변하지 못해 자신을 지속하지 못했던 시간이다.
아이가 없다면 겪지 못했을 여성과 모성의 세계를 통과하는 동시에, 한 해 한 해 커가는 아이 곁에서 어린이의 시선으로 세계를 다시 탐험한다. 여기에 더해 남편이라는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애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오간다. 긴밀한 관계 때문에 나의 세계가 좁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다른 방식으로 넓어지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영화 말미 올리버와 단둘이 짧은 여행을 떠난 엘리오가 한 마리의 동물처럼 포효하며 푸른 산을 내달리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의 모습이 자신을 활짝 열어 세상을 흡수하려는 존재처럼 보여 '사랑에 빠진 사람이란 단지 눈앞의 한 사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세상 전체를 받아들이려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엘리오처럼 세상을 향해 나를 활짝 열고 싶다. 사랑이란 내 앞의 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모든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이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점이 찍힌 면으로 내 앞에 존재한다. 그 면으로 엘리오처럼 뛰어들고 있을까.
여름이 가기 전 올해의 복숭아를 나만의 방식으로 기념하고 싶어 복숭아 타르트를 만들었다. 사랑하는 것을 엮어 나만의 의미망을 짓는다. 여름, 여행, 복숭아, 첫 경험(임신과 출산), 첫사랑(아이와 육아라는 진한 사랑), 그리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환희와 고통, 변화와 상실, 세계의 확장을 통한 너와 나의 지속. 그 모든 의미망의 중심에 타인과 세계를 향해 나를 열게 하는 우리 안의 연약함과 순수함을 담는다.
* [글 굽는 오븐]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다음 연재일은 9월 8일입니다.
읽고 응원해주시는 작가님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