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센티멘탈 밸류>를 보고
※ 이 글에는 영화 <센티멘탈 밸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A 언니에게,
간밤엔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어요. 겨우내 땅속에 묻어두었던 움직임을 밖으로 내보일 때라는 신호일까요? 머지않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봄을 예상하면 대지는 한 시도 잠들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어요. 무에서 태어나는 건 없으니 무언가를 싹 틔우기 위해 소리 없이 들끓었겠죠. 그러고 보니 한 사람의 어린 시절이 그와 유사한 것 같아요. 일견 평온해 보이는 유년기에도 저마다의 역동과 결핍으로 상처가 만들어지잖아요. 그 상처는 어딘가 숨어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 걸쳐 지난하게 파장을 보내고요.
한 집에서 어린 시절을 겪었지만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반응하는 자매가 있어요. 덴마크 출신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영화 <센티멘탈 밸류(Sentimental value)>에 등장하는 노라(레나테 레인스베)와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입니다. ‘센티멘탈 밸류’, 정서적 유산이란 부모나 조부모에게 받은 유품이나 연인에게 받은 선물처럼 내게만 특별한 가치를 갖는 대상을 의미해요. 영화에서는 자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과 그 안의 사물)’이 그런 대상으로 나오고요. 자매와 자매의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까지 삼대가 살았던 백 년 이상의 세월이 쌓인 공간입니다.
공중에서 오슬로라는 도시를 조망하며 시작되는 영화는 도시 내부로 좁혀 들어가 화면 가득 하나의 집을 담아냅니다. 외벽은 짙은 갈색이고 지붕은 초록색, 창틀 일부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목조 주택인데요. 햇살 아래 우뚝 선 집은 주변의 흰 집들과 대비를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풍겨요. 연극배우가 된 노라가 어릴 적 쓴 ‘집’에 관한 에세이가 내레이션으로 흐르는 동안 카메라는 집안 곳곳을 훑으며 노라의 어린 시절을 스케치하듯 보여주지요. 집이라는 기억의 저장소에서 뽑아낸 이미지로 가족의 역사와 관계에 앉은 더께를 전달해요. 엄마, 아빠의 다툼과 아빠의 떠남, 집을 차지한 침묵과 긴장, 서로의 내면에 비밀스레 생겼을 상처.
뒤이어 현재로 건너뛴 화면에서는 노라가 막이 오르기 직전의 무대 뒤에서 공황 발작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벌어져요.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아버지의 부재와 그로 인한 결핍이 노라의 내면에 트라우마를 남겼을 테지요.
어머니의 죽음으로 자매는 오랜만에 아버지 구스타브(스텔란 스카스가드)와 재회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영화감독인 구스타브는 노라에게 각본집을 내밀며 “너를 위해 썼다”라고 주연을 제안합니다. 노라가 출연했던 연극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영화에만 열을 올리는 구스타브의 모습에 노라는 시나리오를 보지도 않고 출연 제의를 거절해요. 그러고는 집을 처분하러 돌아온 아버지와의 마주침도 회피합니다. 그 사이 구스타브는 15년 만에 영화 제작을 재개하고 노라 대신 할리우드의 유명 여배우를 캐스팅합니다.
노라가 읽지 않고 무시해 버린 시나리오에서 아버지 구스타브의 진심을 발견하는 건 여동생 아그네스예요. 아그네스 또한 그녀의 아들 에리크를 영화에 출연시키려는 구스타브의 일방적인 처사에 그동안 억눌러왔던 반감을 표출하지요. 하지만, 회피와 단절을 택한 노라와 달리 아그네스는 가족과 집을 떠났던 구스타브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할머니에 대해 이해해 보고자 시도합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반 나치 저항 운동에 가담한 전적으로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했던 할머니의 기록을 찾아보고 구스타브의 시나리오도 밤을 새워 읽어 내려가면서 연결과 소통을 향해 움직이지요. 할머니와 아버지가 보였던 단절의 행위 뒤에 숨어있던 진실한 감정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아픔과 사랑에 대한 갈망은 자매가 함께 통과한 일인데도 노라와 아그네스 두 사람에게 남은 상흔은 달라 보여요. 아버지 앞에서 여전히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노라는 사춘기 소녀나 사랑의 열병에 빠진 사람 같지요. 그에 비해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큰 동요 없이 자신의 일을 담담하게 해 나가는 아그네스는 지나치게 어른스러워 무심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머니의 장례식 뒤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접대하고 오래된 집의 물건을 정리하는 일도 아그네스가 도맡아 하거든요.
그래서일까요, 제게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주체하지 못하는 노라에 비해 평정을 유지하는 듯 보이는 아그네스가 더 위태롭게 다가왔어요. 그나마 노라는 자신의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대개 상처란 덮어두기만 할 때 더 심각하게 곪아버리기 마련이잖아요. 그러니 아그네스의 침착함이 무언가를 억누르거나 가장하기 위함은 아닐까 의심스러웠지요. 같은 시간을 통과하고도 두 사람이 지닌 감정의 온도 격차에 호기심이 동했어요. 무엇이 둘을 다르게 만들었을까요? 노라가 민감한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 난 배우이고 아그네스가 객관적 시선을 갖춰야 하는 역사학자라는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요. 그러니까 이 글은 아그네스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시도인데요, 그것은 적극적인 오해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란 신에게 하는 게 아니라 절망을 인정하는 거예요.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용서해 줘"라고 말하듯이요. (...)
저는 모든 걸 망쳤어요.
그런데 마침 혼자서 울고 있죠.
난생처음으로 바닥에 앉아서 기도했어요.
도와주세요. 더 이상 못 하겠어요.
혼자서는 못해요. 내겐 집이 필요해요.”
- 구스타브의 시나리오 중에서
구스타브의 시나리오에서 이 대목을 읽으며 아그네스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했던 선택을 떠올렸을 거예요. 더없이 약하고 절망에 빠진 상태,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위태로운 상태였음을 헤아렸겠지요. 그게 바로 지금 노라의 상태일 테고요. 아버지 구스타브가 시나리오를 통해 노라에게 애정 어린 공감과 자신의 과거에 대한 사과와 용서를 건네고 있음을 아그네스는 알아챕니다. 시나리오 속 절망을 토로하는 젊은 엄마 역은 배우인 노라에게 제안되었지만, 그녀의 아들 역은 아그네스의 아들 에리크에게 맡겨집니다. 에리크의 참여를 위해서는 아그네스의 허락과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요. 그렇기에 시나리오에 담긴 구스타브의 진심은 노라와 아그네스 둘 다를 향합니다. 그걸 먼저 발견한 아그네스는 시나리오를 읽어보라고 노라를 설득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마침내 구스타브의 시나리오를 읽고 난 노라와 아그네스가 침대에 마주 앉아 유년기와 자신의 상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부분이지요.
“넌 이렇게 잘 자랐는데 난 완전히 망가졌어.”
“나도 쉽지는 않았어.”
“너는 가정을 꾸렸잖아. 집이 있잖아.”
“우리가 자랄 때 차이가 있었지. 내겐 언니가 있었잖아. 엄마가 힘들어하면 언니가 내 머리를 감겨 주었어... 내 옆에 언니가 있었어. 그게 안심이 되었어.”
- 노라와 아그네스의 대화
아그네스에겐 노라가 있어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타격이 크지 않았던 거예요. 부모로부터 전해지는 부정적 감정, 그 정서적 유산으로부터 노라는 아그네스에게 방패 역할을 해주었던 거죠. 구스타브에 대한 노라와 아그네스의 반응이 달라지는 지점에는 어린 시절 보살핌을 제공하는 존재의 유무가 있어요. 이혼 후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던 어머니는 어린 자매에게 충실한 돌봄을 제공하지 못했을 거예요. 노라 곁에는 안정감을 건네주는 어른이 없었겠지요. 반면 아그네스에게는 어리더라도 자신보다는 나이가 많고 언제나 곁을 지키는 언니 노라가 있었어요. 노라의 존재로 아그네스는 어릴 적 필요했던 정서적 안정을 채웠고 부모가 되어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성인으로 자랐을 거예요.
한 몸처럼 자랐지만, 결코 한 몸일 수 없고 성장하면서 알게 모르게 벽을 느꼈을 두 사람이 간신히 서로의 솔직한 내면을 내보이는 순간, 말로 전하기 어렵고 복잡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두 배우의 빼어난 연기가 빛을 발합니다. 현실에서는 닿기 어려운 기적 같은 순간이라 제겐 꿈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고요.
이 장면은 가장 아름다운 동시에 가장 슬픈 장면이기도 해요. 두 사람이 서로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씬인 동시에, 아버지가 지닌 인간으로서의 나약함을 수용하는 장면이기도 하니까요. 나보다 강한 어른이라서 자매는 어린 자신들을 보호해 주고 한없는 애정을 보여주길 아버지에게 바랐었지만, 실은 그도 절망 속에 절규하던 한 인간이었음을, 누구보다도 보살핌이 필요한 불완전한 사람이었음을 뒤늦게 확인하게 되니까요. 그게 모든 인간의 숙명이자 어른이 되는 슬픔이 아닐까요. 커다랗고 강인해 보이기만 하던 부모의 뒷모습에서 그가 간신히 숨겨왔던 어린이를 보는 일이요. 그러고 나면 쉽사리 원망할 수 없게 되고요.
아그네스의 정서적 안정감에는 노라라는 존재의 기여가 크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화에 출연해 관심을 받으며 ‘우주의 중심’이 되었던 기억도 중요하게 작용했어요(네, 아그네스에게는 과거 아버지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행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그네스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고 있을 때 노라가 등장해 테이블 중심에 있던 커다랗고 붉은 꽃병을 가로채 가던 장면은 아무래도 노라의 숨은 욕망을 드러내는 컷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노라에게 아버지의 관심을 독차지하며 ‘우주의 중심’이 되어보고 싶다는 오랜 갈망이 있었음을, 붉은 꽃병은 은유한다고요.
구스타브의 얼굴이 노라의 얼굴로, 노라의 얼굴이 아그네스의 얼굴로 미세하게 변화하던 장면도 있지요. 노라 안에는 노라만이 아니라 구스타브와 아그네스,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까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조각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요. 그건 구스타브나 아그네스에게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얼핏 이 영화는 구스타브와 노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 같지만 한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가족이라는 관계의 역동과 정서적 유산을 탐구하는 영화일 것입니다. 집과 가족,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며 기억을 쌓는 사람들이 어떻게 각기 다른 고유한 자신이 되는지 들여다보는 영화이지요. 그러면서 우리 안의 연약한 부분이 친밀하지만 이해불가한 타인을 향한 공감과 연민의 싹이 자라나는 곳임을 알려줘요.
그러므로 구스타브가 쓴 시나리오는 자신과 노라라는 두 개의 점을 연결하기 위한 선분이 아니에요. 구스타브와 아그네스를 잇고, 아그네스에서 노라로, 노라에서 구스타브로 이어지는 삼각형의 면을 형성하지요. 거기에는 구스타브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아그네스의 아들 에리크로 형성되는 또 하나의 삼각형도 존재합니다. 그 둘을 포개면 별 모양의 입체가 그려지겠지요. 하나의 점인 사람들이 친밀하게 연결되는 관계의 궤적, 그 정서적 공간에 진정한 집이 있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는데 하나의 문구가 제 눈을 사로잡았어요. 영화에 출연한 배우와 영화를 위해 일한 스태프의 가족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문구였어요. 영화를 만드느라 집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그들을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어 고맙다는 말이었어요. 영화를 위해 헌신한 많은 사람들 덕분에 영화는 완성되었습니다. 그 다수의 각각은, 변함없이 그들 곁에 머물며 기다려주는 이들 덕분에 존재하고요. 늘 곁을 지키는 친밀하고 믿음직한 관계가 한 사람을 여기 살게 하며 또 다른 대상의 존재에 기여하게 한다고 영화는 마지막까지 전합니다.
이 글을 다 적고 나자 아그네스에게 품었던 의문도 옅어졌습니다. 영화에서 노라는 결국 제안을 받아들여 아버지의 영화에 출연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들 사이의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지는 않을 거예요. 마찬가지로 지금은 침착하고 덤덤해 보이는 아그네스에게도 언제든 절망의 순간은 찾아올 테고요. 백발의 구스타브가 홀로 남은 밤이면 여전히 괴로움에 시달리듯이요. 고요한 듯했던 유년기가 한 사람의 내면에 남긴 상처와 통증은 그처럼 반복하여 우리를 찾아올 겁니다. 다만, 또다시 홀로 울게 되더라도 내 안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는 자리가 누군가를 향한 공감과 연민의 싹을 틔우는 가능성의 자리임을 기억할 것입니다. 홀로 우는 시간의 이름은 고통만이 아니라 희망이기도 하다는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