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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Jun 03. 2021

모으고 싶은 시간

서로에게 발맞추려는 마음



마을버스를 타려고 시간표를 확인했다. 다음 버스는 12분 후 도착이다. 휴우, 한숨 한 번 내쉬고  마음을 다독여 정류장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았다. 핸드폰 어플을 열어 몇몇 글을 훑어보다 고수리 작가의 글에 눈길이 머물렀다. 



‘시간이 너무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글에 ‘시간이란 모으는 것, 누리는 것, 간직하는 것’이라고 바꿔 생각해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글을 읽고 메모 어플을 열어 이렇게 적었다. ‘시간을 모으는 사람’ 그러는 사이 마을버스가 도착했다. 시간을 버린다고 생각했던 12분이 핸드폰 속에 세 개의 단어로 저장되었다. 12분이라는 시간보다 귀한 무언가를 모은 기분이었다.  



시간은 흐른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시간은 흐르며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없어질 시간을 대체하는 무언가를 얻으려고 애쓰는 것 같다. 시간을 누리는 대신 시간을 보상해줄 무언가를, 눈에 보이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을 찾는데 몰두해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그런 걸 찾지 못하면 시간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허투루 시간을 써 버렸다고 자책하고 안타까워하는데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또 흘러간다. 그러다 우리는 시간 뒤로 밀려나기도 한다. 시간과 발맞춰 걷는 게 아니라 뒤에서 간신히 쫓아가는 사람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모이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내가 머물고 있는 시간이 모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 자체에 진심을 다하게 되지 않을까. 써 버린 시간을 대신해줄 무언가를 찾느라 시간을 보내 버리고 마는 게 아니라, 시간을 간직하고자 그 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럴 때 우리는 시간 안에 잠시 머물거나, 시간과 나란히 걸을 수 있다.



하원하는 아이와 함께 근처 공원으로 갔다. 한낮의 여름처럼 볕이 따가워 그늘로 숨고 싶은 오후였다. 햇빛을 피해 도망치듯 들어온 우리는 커다란 나무들이 줄기를 뻗고 잎사귀를 펼쳐 그늘을 드리운 길에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더위는 누그러들고 걸음은 느려졌다. 하지만 우거진 숲이 천막을 그려도 어김없이 그걸 뚫고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는 빛 무더기가 있었다. 그걸 바라보다 놀이를 하기로 했다. 



빛의 속도로 달려 빛을 통과하는 놀이. 빛 무더기가 나타날 때면 그 앞에 멈춰 서 아이와 손을 꼭 잡고 심호흡을 한 후 우리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다. 그렇게 빛 무더기를 뛰어넘어 다시 그늘에 닿으면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깔깔깔깔, 깔깔깔깔. 서로의 자리를 존중해주는 나무들은 각자 침범하지 않으려는 듯 경계를 그렸고, 그 사이로 빛이 비어져 들어왔다. 작은 냇물을 건너 듯 폴짝, 때로는 커다란 강을 건너 듯 껑충, 우리는 폴짝 거리며 빛 웅덩이를 뛰어넘었다.



"자, 빛의 속도로 달리는 거야, 하나, 둘, 셋!" 



아이와 발바닥에 온 힘을 주고 훌쩍 뛰어오르던 찰나, 우리는 잠시 빛의 속도에 닿았을까. 우리가 정신없이 몰두했던 순간, 우리는 잠시 빛 속에 녹아들지 않았을까. 어떤 순간 빛이 되거나, 불가능한 정도의 가능성으로 빛의 속도에 가까워졌을지 모르겠다. 힘껏 도움닫기를 하고 땅에서 떨어져 하늘로 솟아올랐을 때, 나도 세상도 잊혔던 바로 그 순간에, 시간은 잠시 멈추었고 기억은 그 순간에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찰칵. 시간이 모이는 소리였다.



집으로 돌아와 냉동실에 있던 망고 아이스크림을 반으로 쪼개어 아이와 나누어 먹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만들어 온 스케치북(색색깔의 종이를 덧붙여 만든 스케치북이었다)에 공원에서 보았던 꽃밭을 그리며 놀았다. 모처럼 일찍 퇴근한 남편과 함께 세 식구가 오손도손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는 잠들 때까지 게임을 하며 신나게 놀았는데, 셋이 한 줄로 서면 맨 뒤에 있는 사람이 앞사람에게 동물 흉내를 내보이고 그러면 두 번째 사람이 그걸 똑같이 따라 해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동물 이름을 맞추는 거였다. 앉았다 일어났다, 팔을 휘저었다, 바닥을 기며 온 몸으로 동물 흉내를 내는 사이 우리 셋은 모두 어린아이가 되었다. 



시간을 모을 수 있다면, 어떤 시간을 모아야 할까. 길바닥을 가득 채운 초록의 그늘 사이로 빛 무리가 떠 있던 자리를 뛰어넘던 시간이나 세 식구가 좋아하는 생선 구이에 젓가락, 포크를 동시에 들이대며 나누어 먹던 순간, 바닥에 엎드려 동물 흉내를 내며 배꼽 빠지게 웃던 찰나나 노느라 열을 올리는 사이 아이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등으로 쓸어주던 밤, 이런 시간을 모으고 싶다. 시간이 무언가로 대체될 수 있다면 아이의 이마에 맺힌 땀의 감촉이나 티 없는 웃음소리의 잔상, 반짝이는 눈동자의 빛이나 열기에 더워졌다 식으며 한기가 도는 살결, 깨끗이 비워진 접시 같은 것이면 좋겠다. 



그런 시간을 누린 날엔 시간을 모은 것 같다. 하루가 가버렸다는 아쉬움보단 하루를 잘 살았다는 흐뭇함이 찾아온다. 하루를 살아낸 몸 어딘가에 시간의 흔적이 남았을 것만 같다. 열심히 달렸던 발바닥 밑으로, 소리 내어 웃었던 입 안으로 시간이 모이지 않았을까. 그런 시간이 씨앗처럼 남아 우리 몸에서 자랄 것 같다. 차곡차곡 아이의 키를 자라게 하고 조곤조곤 우리 안에 이야기를 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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