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가는 산책
저녁이 길게 느껴졌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노는 동안 미끄럼틀 끄트머리에 앉아 발목을 주물렀다. 잠깐 서 있었을 뿐인데 발목이 부러질 듯 아팠다. 골다공증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일을 제치고 운동을 해야 할 나이가 된 것 같아 조금 울적했다. 요 며칠 쉽게 지쳤고 무기력할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몸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만큼 뿌연 유리막 한 장이 껴 있는 듯 정신도 흐릿해졌다. 맑고 또렷한 정신, 생생한 활기가 필요했지만, 어디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저녁이 길게 느껴졌다. 아이가 잠들 밤이 까마득했다. 작은 욕조에 물을 채워 아이를 놀게 한 후 냉장고에서 캔 맥주 하나를 꺼냈다. 아이는 욕조 안에 다리를 뻗고 앉아 인형을 목욕시키고 낚시 놀이를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봐 달라며 내가 화장실 문 앞에 앉아 있길 바랐다. 거기 앉아 맥주를 마시며 백수린 작가의 소설집을 읽었다.
"나는 어디서든 언니가 잘살고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곳으로서는 드물게 폭우가 쏟아지고, 코를 골며 잠든 브리스의 옆에서 홀로 긴 시간 뒤척이는 새벽이면 나는 오래전 비아리츠에서 내가 잃어버린 반지를 찾기 위해 언니와 식당으로 되돌아갔던 일을 떠올린다. 다행히도 화장실의 세면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던 반지를 찾은 후 우리가 식당 밖으로 나왔을 때 거리에는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어쩌면 좋을지 망설이는 사이, 언니가 먼저 우산을 펼쳐 들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산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비였다. 언니는 이내 우산을 접더니 비를 쫄딱 맞은 채 나에게 빗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지 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처럼. 지금도 그날을 추억하면 빗속을 뛰어가는 언니와 나의 모습은 손끝에 닿을 듯 생생하고,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울고 싶어진다."
백수린, 「 시간의 궤적 」, 『여름의 빌라』중에서
유리컵에 가득 찼던 맥주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단편 소설 하나가 끝났다. “지금도 그날을 추억하면 빗속을 뛰어가는 언니와 나의 모습은 손끝에 닿을 듯 생생하고,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울고 싶어진다.”라는 문장으로. 그래서 나도 울고 싶어졌다. 눈물이 눈앞을 흐렸다. 나도 폭우 속을 달리며 언니와 함께, 한껏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그땐 밤이 영원하길 바랐지
2년 휴학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때, 친했던 친구들은 이미 졸업하고 없었다. 친구의 룸메이트였던 선배 언니가 학교 근처에 살고 있어 그녀 대신 자주 만났다. 늦은 밤 언니의 방을 찾아갈 때면 친구가 날 위해 언니를 남겨두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때로는 학교 앞 술집에서 만나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우리가 가던 맥주집은 ‘털보네’(진짜 이름이 이거였는지 아리송하지만)였는데 곰돌이 푸우처럼 덩치가 크고, 턱에 수염을 기른 아저씨가 주인이었다. 기다란 잔에 담겨 나오는 독일식 맥주가 맛있었고 감자칩과 김, 땅콩과 김말이 과자, 치즈가 나오는 마른안주는 딱 내 스타일이었다.
얇은 슬라이스 치즈는 그 위에 조심조심 반듯한 선을 그어 작고 촘촘하게 격자무늬를 만들었다. 그러면 앙증맞은 네모 모양으로 떼어먹을 수 있었다. 몇 개의 치즈 조각이면 밤을 보내기에 충분할까 고심하며, 모자라지 않게 잘게 잘랐다. 그리고 이쑤시개에 하나씩 찍어 아껴 먹었다.
거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갔던 곳이다. 좁은 골목 사이에 숨어 있어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었고 맥주 가격이 저렴한 건 아니었으니까 특별하게 기억하고 싶은 순간에 발걸음이 향했다. 맥주가 맛있어서, 좋아하는 사람과 있는 시간이 지속되길 바라서, 거길 가면 늘 술을 많이 마셨다. 술잔이 한 번, 두 번 …… 다섯 번 채워지고 비워지도록.
밤이 깊어질수록, 술에 취할수록, 집에 가기 싫어졌다. 카운터 쪽에 있는 커다랗고 성능이 좋아 보이는 스피커에서는 감미로운 음악이 한 톤 낮게 흘러나왔고 노란 조명이 드리운 공간은 웅성거리는 사람들 목소리로 밀도가 짙어졌다. 저마다의 내밀한 이야기가 깊은 웅덩이처럼 그 안에 고였다.
그 시절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누었을까. 술잔이 거듭 채워지고 비워지도록 끝없이 이어지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그땐 밤을 영원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밤이라는 캔버스에 온갖 물감을 덧대어 발랐고 어둠이라는 물감의 목록엔 끝이 없길 바랐다. 간절했던 마음이 생생해서 낯설다. 그 이야기와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골목을 찾아가면, 깊은 웅덩이가 흔적처럼 남아 있을까.
언니와 연락을 하지 못한 채 한 해가 갔고, 또 해가 바뀌었다. 바쁘게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만 했다. 언니가 없었더라면 통과하지 못했을 시절이 있었는데,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언니는, 그 시절 언니의 존재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미처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슬프고 힘들어도, 언니를 만나러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참았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는 얕게 숨을 내쉰 뒤 “현진아” 하고 부르던 언니의 목소리면, 울 것 같다가도 웃을 수 있었다.
소설과 맥주가 구원해준 밤들, 그리고 언니
그 시절 우리는 뜨거워서 힘들었는데, 어제의 나는, 무감각해서 차가웠다. 그때 우리는 쉽게 흔들려서 자주 울었는데 어제의 나는, 미세한 떨림조차 없는 평온한 일상에 지루했다. 그러니 내일의 피곤 따위는 잊고 소설이 띄워 보낸 감정의 순간에 빠져들고 싶었다. 나는 그리워졌고, 조금 슬퍼졌다. 밤이 길게 느껴져서 더 그랬다. 그래서 누군가를 다정하게 부르고 싶었고, 애쓰지 않아도 소설처럼 내 안에서 어떤 시간이 풀어져 나왔다. 쓸쓸했지만 아름답게 추억했다.
차갑게 톡 쏘는 맥주는 맛있었고, 소설은 매혹적이었다. 오랜만에 맥주 두 캔을 비운 탓에 밤사이 온갖 꿈을 꾸었고, 다음날 새벽 기상은 날아갔다. 하지만 맥주를 마시며 소설을 읽던 밤이 기억 속에서 발그레 물이 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언니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때처럼 언니는 내 말을 기다렸다 "그래그래"하고 답했다. 그러곤 작은 일에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대화를 마치기 전 우리는 만날 약속을 잡았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밤을 새워야 할 지경이라며 언니는 리스트를 만들겠다고 했다. 다시 만나면 예전처럼 간절한 마음이 들겠지. 이 저녁을 영원으로 바꾸고 싶다고. 그 시절 우리가 함께했던 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