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가는 산책
마음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면 괜찮은 하루라고 생각한다. 일기를 쓰거나 하루를 돌아볼 때, 이때 참 좋았어하고 떠오르는 순간 하나만 있다면 충분하다. 대단한 걸 바라거나, 큰 즐거움을 기대하면 하루는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기분 좋은 순간 하나 정도를 바라면 의외로 만족스러운 하루가 되기도 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기쁨을 발견하거나 뜻밖의 감동을 마주할 수 있다. 그냥 지나칠 뻔했던 순간을 곱씹으며 의미를 새겨보는 것도 가능해진다.
삶에는 비례보다 반비례의 법칙이 통한다. 기대가 낮을수록 기쁨은 커지고 바라는 게 적을수록 돌아오는 게 많아진다. 하루로 치면 즐거운 장면 하나일 테지만, 매일이 쌓이면 일 년에 365개. 작지만 소중한 기쁨으로 1년이라는 앨범이 채워지면 좋겠다.
저녁 먹기 전 딸아이와 산책을 나섰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다.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남은 손으로 아이 손을 잡고 걸었다. 나무들이 늘어선 산책로로 들어서자 빗소리가 달라졌다. 나뭇잎이 지붕처럼 드리운 그 길에서 빗소리는 가벼워지고 옅어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는 사이 빗줄기가 서서히 굵어졌다. 너른 잔디밭에 도착했을 땐 우리 밖에 보이지 않았다.
빗줄기가 그리는 희미한 대각선들이 허공을 채웠고 하늘에는 연회색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타닥타닥 하는 빗방울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세상을 꽉 채웠다. 커다란 무대 위에 나와 아이 둘만 서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아이 뒤로 비둘기 한 마리가 걸어갔다. 텅 빈 공간을 비가 채우던 그 순간, 익숙한 풍경은 한 발 물러나 낯설어졌고 물기를 머금어 신비로운 베일을 덧입었다. 아이는 물웅덩이 위로 발을 튕겼고, 나는 한자리에 서서 빙 돌며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 빗줄기가 쏟아지는 소리, 하늘을 뒤덮고 역동적으로 흐르던 구름. 나와 아이, 비둘기 한 마리만이 아는 저녁 6시 반 경 비 내리는 공원. 세상의 비밀스러운 장면 하나를 목격했다.
하루에 한 장면. 어떤 날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반갑게 만나는 듯한 모양의 구름을 보았다. 어떤 날은 타인의 뒷모습에서 어른의 무게를 읽었다. 또 다른 날엔 아이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아이처럼 신나 했고. 하루는 잘 구운 생선을 세 식구가 맛있게 나눠 먹은 게 그렇게 좋았다. 하나의 순간으로 하루는 꽉 찬 듯 충만해졌다. 좋은 일이 많아서 기쁜 게 아니라 평범한 하루에 보석처럼 숨어 있는 순간을 발견해 좋았다.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세 달간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여정의 마지막 한 달을 맞으면서, 지극히 평범한 어느 저녁의 동네 광장에서 깨달았다. 하루에 한 장의 사진이 남는 날이면 충분하겠다고. 수십 장의 사진을 찍었던 초반의 여정을 넘어 피로가 쌓이고 적당한 게으름이 더해지면서 찾은 리듬이 알려준 것이다.
처음엔 남들이 모르는 새로운 걸 발견하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욕심을 부려 바쁘게 다녔지만 특별한 무언가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런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낯선 풍경조차 익숙해져 갔다. 서울에서 처럼 일상이 흐르기 시작했다. 몇 개의 도시를 지나면서 피로가 누적되자 조바심은 잦아들고 여유가 찾아왔다. 많은 곳을 다니지 않았고 천천히 걷고 머물렀다. 바쁘게 계획을 짜지 않고 굳이 어딘가를 가려하지 않는 상태가 만족스러웠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산보를 나섰다. 길모퉁이를 돌자 숨겨놓았다는 듯 작은 광장과 성당 하나가 나타났다. 간결한 곡선과 모노톤의 단출한 성당의 파사드는 화려한 두오모보다 아름다웠다. 성당은 광장에서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관광객이 아닌 그 도시의 사람들이 한가롭게 일상을 사는 곳. 주변의 풍경에 스며들고 싶어 광장의 계단에 오래 앉아 있었다. 그날 찍은 사진은 성당의 파사드와 광장의 한편이 담긴 한 장뿐이다. 남은 여정도 이런 한 장이 남는 날이면 충분하겠다 생각했다.
그 뒤로는 예전처럼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았다. 내키는 대로 게으르게 다녔다. 그러면서 뜻밖의 장소를 발견하고 생각지도 않은 호의를 얻었다. 남들이 알아주는 장소가 아닌 나만 아는 곳을 품게 되었다. 작은 마을의 아주 낡은 성당이나 섬마을의 바닷가, 손님이 없던 한낮의 카페,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소설책을 읽던 빨래방과 단골이 되고 싶었던 책방. 여러 개의 좋은 것보다 딱 하나 괜찮은 것, 남들이 좋아하는 게 아닌 내게 어울려서 좋은 것, 그런 하나를 남기는 매일로 여행을 채웠다.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여러 개의 좋은 것보다 한 두 개의 괜찮은 장면이 있는 하루, 남들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게 잘 맞아 좋은 매일. 그런 날들이 쌓여가는 삶이면 충분할 것 같다.
오늘도 하루는 흐른다. 하지만 어느 모퉁이에서 어떤 장면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마음에 청신한 바람이 스치는 순간이나 윤슬처럼 빛나는 찰나와 잠깐 맞닿을지 모른다. 그런 장면 하나로 썩 괜찮은 하루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