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가는 산책
높고 푸르른 하늘은 서서히 가을빛을 띄고 있지만 날씨에는 여름의 미련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한낮의 열기는 여전히 후끈하다. 답답한 마음에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 조금 걷고 싶었다. 간단히 가방을 챙겨 지난번에 갔던 카페 쪽으로 걸었다. 성수동에서 꽤 유명한 카페의 2호점이 집 근처에 생겼다. 감각적인 공간에 커피 맛이 좋고 일하는 스텝들도 친절하다. 공간은 작지만 밖으로 향한 커다란 창이 있고 거기에선 담쟁이로 뒤덮인 건너편 담장이 보인다. 초록의 잎사귀가 그려내는 풍경 속에서 잠시 쉬고 싶었다.
카페로 가는 길은 아파트 정문부터 큰길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동네를 관통한다. 재개발 예정지인 동네는 작고 낮고 오래되어 낡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간판이 제대로 없는 가게가 많고 전면이 가려져 무슨 가게인지 알 수 없는 곳도 있다. 동대문에서 가까워 봉제 공장이 여럿인데 이전 가게 자리에 인테리어도 바꾸지 않은 채 들어앉아 있다. 내일 가보면 다른 가게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곳. 막 벗어난 아파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이 펼쳐진다. 플라스틱 지붕을 얹은 시멘트 집, 좁아 보이는 다세대 주택, 아직도 이런 집이 있구나 싶어 기분이 묘해진다. 이사 온 초기에는 허름하고 정돈되지 않은 길이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어두운 밤에는 절대 다닐 수 없을 것 같은 길. 그래서 한동안 이 길로 다니지 않았다. 마음에 벽이 있었다.
아파트 후문에서는 지하철 5호선에 해당하는 전철역이 가깝고 정문에서는 6호선을 탈 수 있는 전철역이 가깝다. 한 번은 6호선을 타러 그 길로 나갔는데, 그 뒤로는 자주 발길이 그리로 간다. 다닐수록 묘하게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어서다. 골목 구석구석이 눈에 익자 지저분한 게 아니라는 걸, 위험하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철물점, 야채가게, 백반집, 구제 옷가게, 구멍가게, 미용실, 옷수선집, 선술집, 목공소, 인테리어 가게, 화분 파는 집……. 작은 가게들을 흘낏거리며 정체를 파악해냈다. 작은 가게 앞에 빼곡하게 화분을 늘어놓고 울창하게 키워내는 집들도 많았다. 낮은 담장 아래, 좁은 골목 사이로 꽃나무들이 보였다. 동네 아저씨들이 길가에 모여 앉아 환담을 나눴고(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기도 했고) 문을 활짝 열어놓은 백반집에서는 갓 지은 밥 냄새가 달큰하게 번졌다. 문이 빼꼼 열린 낮은 집 앞에 유난히 잘 키운 식물이 나와 있어 안쪽을 들여다보니 널따란 마당에 식물이 가득했다. ‘화분’이라고 써 놓은 하얀 판자가 놓여 있었다. 몇 번 다니다 보니 처음엔 보이지 않던 사람 사는 모습이 보였다. 삶의 온기가 느껴졌다. 작고 복닥거려 이상하게 더 마음이 가는 그런 온기. 오래된 골목에는 숨은 그림처럼 아기자기하고 어여쁜 것들이 감추어져 있었다.
이발소 옆 풍선초 화분에 달린 풍선은 얼마나 많아졌는지, 화원 앞에는 무슨 꽃이 나와 있을지, 할머니가 하는 야채가게에서 오늘은 어떤 야채를 파는지, 나무 공작소라고 쓰여 있는 곳에서 정말 목공을 하는지, 이런 궁금증이 늘어갔다. 그러다 문득 머지않아 사라지겠지, 하는 생각에 닿자 마음이 쓸쓸해졌다. 버젓이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인데도 어느 날 갑자기 이 모든 게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번쩍거리는 새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여차여차해서 전세로 들어온 집이다. 원래 여기에 어떻게든 집을 사서 들어오려고 했다. 연식이 오래되었지만 브랜드 지명도가 있는 아파트고 앞쪽으로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근처가 재개발이 되면 아파트가 오래되었을지라도 재개발 인근 지역이라는 호재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심각하게 따져보지 않고 재개발을 지지하는 입장이 되어 이 동네로 흘러 들어온 것이다. 재개발은 예정이지만 거의 확정이나 마찬가지였고 당연히 개발이 되어야 한다는 쪽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주변 아파트들에 비하면 동네가 낙후되어 보여 떨떠름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전세로 살고 있어 재개발이 되든 말든 중립적인 위치가 되어서 일까. 재개발로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전철역까지 곧게 이어져 있는 길, 낡은 동네를 관통하는 길은 없어지고 큰 일로 돌아가야 해서 대중교통 이용에 불편해질 가능성이 높다. 거대 단지가 조성되어 인구 밀집도가 올라가면 동네의 겉모습도 뻔해지겠지. 높다란 아파트만 빼곡히 들어선 딱딱하고 삭막한 곳,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판에 박힌 아파트촌이 될 것이다. 어느새 재개발에 부정적인 입장이 되어버렸다. 개발의 방향이 꼭 낡은 것을 없애 새로운 것을 지어 올리는 걸 향해야 하는지 의문을 던지던 단편 소설이 떠오른다. 그러게, 꼭 아파트여야 할까.
카페에 도착해 따뜻한 라떼를 주문했고 2층으로 올라가 창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길가에 면한 작은 2층 집이었을 공간이다.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아내 카페를 만들었을까. 그걸 허물고 건물을 새로 지어 올리는 대신 겉모습을 남기고 내부만 현대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2층의 천정은 원래의 고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밖에서 보면 트렌디함을 표방한 것 같지만 2층에서는 여백과 고전적 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게 카페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다시 오래된 동네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왔다. 숨겨진 보물을 찾듯 좌우를 살피며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좌판에 널린 야채의 가지 수가 열 손가락에 꼽히지도 않는 가게 안에 옥수수 다발이 덩그러니 걸려 있는 걸 보았다. 모노톤의 벽에 검은 알갱이와 노란 알갱이가 섞여 모자이크 같은 옥수수가 홀로 놓여 있었다. 텅 빈 벽에 걸린 옥수수 다발이 내 눈엔 미술관에 걸린 정물화 같았다. 나만의 정물화 하나를 품고 언덕길을 올랐다. 걸을수록 이 길과 나 사이가 돈독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