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자라는 엄마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창 밖으로 바람에 휘청거리는 나무들이 보였다. 기분이 가라앉았고 사소한 것이 눈에 거슬렸다. 쓰레기가 가득 찬 쓰레기통, 수납장 위에 뒹굴고 있는 마스크들, 냄비 속에 담겨 카레가 뒤엉켜 있는 국자와 숟가락, 덮지 않은 뚜껑,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젖은 수건, 테이블 위에 한가득 늘어져 있는 아이의 장난감. 돌아서면 치우기, 돌아서면 설거지, 돌아서면 밥하기, 돌아서면 놀자고 보채는 아이……
아이 낮잠을 재우다 같이 잠이 들었다. 얼핏 잠이 들었다가도 아이가 잠들면 바로 눈이 뜨이곤 했는데 이번은 예외였다. 정신이 들었다가도 무겁게 덤비는 잠을 떨쳐낼 수 없었다. 지난밤에 꺼내 둔 솜이불 때문일까. 모든 걸 잊고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꽤 오래 잤다. 덜컹, 덜컹, 불안한 소리가 귓전에 울리는데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덜커엉-, 방 전체를 울리는 소리에 간신히 깼다. 베란다로 나가 열려 있던 창문을 닫고 잠시 앉아 있었다.
아, 잘 잤다! 아이의 외침이 들렸다. 엄마-하는 울음이 아닌, 기분 좋은 외침이었다. 방으로 가보니 아이가 침대 맡에 앉아 있었다. 잠에서 막 깬 요정처럼 눈썹 아래 달콤한 잠을 매단 채. 아, 잘 잤다-. 나도 아이를 따라 큰 소리로 외쳐보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다가가자 아이는 다시 누워 기지개를 켰다. 쭉 뻗은 아이의 다리를 주물러주고 돌아 누운 아이의 등을 쓸어주었다. 아이는 척추를 따라 있는 가느다란 골을 손가락으로 쓸어주는 걸 좋아한다. 옷 위로 등골을 쓸어주었더니 옷을 들어 올려 맨살에 해달라고 했다. 얇고 보드라운 살을 손가락으로 쓸어주었다. 몸을 움찔하면서도 좋아, 하고 아이는 말했다. 기다란 골을 따라 주욱 내려가 꼬리뼈에 닿자 장난기가 발동했다. 며칠 전 읽었던 그림책 생각이 났다. 갑자기 꼬리가 생긴 아이와 그런 아이를 둘러싼 어른들의 이야기. 어, 꼬리가 생겼네! 놀란 척 말을 던졌다. 장난이라는 걸 알아채고 아이도 고개를 돌려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잠에서 깨기 위한 의식을 마친 후 거실로 나와 블루베리 케이크와 우유를 먹었다. 점심을 먹기 전 아이와 함께 만들어 두었던 거다. 파운드케이크 반죽 위에 블루베리를 졸여 만든 콩포트와 크럼블을 올려 굽는데 나와 아이 둘 다 좋아하는 케이크다. 이런 날엔 달게 잔 낮잠과 케이크 한 조각이 소중하다. 괜찮다가도 기운이 빠지고 답답해지는 날을 조금 견딜만하게 해 주니까. 아이와 하는 인형 놀이, 잠깐 고개를 돌려 내다본 창 밖 풍경, 말없이 잎을 키우고 있는 몬스테라, 일상의 작은 여백에 기대어 하루를 보냈다.
저녁 샤워를 마친 후 아이에게 긴 팔 실내복을 입혔다. 밤사이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간밤에는 솜이불을 꺼내 리넨 커버를 씌웠다. 이불을 덮지 않는 아이에겐 긴팔을 입혀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씻는 사이, 먼저 화장실에서 내보낸 아이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평소 같으면 몇 번이고 문을 열고 언제 나오냐고 물었을 텐데. 샤워를 끝내고 옷을 입는데 아이가 빼꼼 문을 열고 말했다. 다 했어? 책 정리해 두었어.
우리 집 침대는 프레임이 매트리스보다 커서 매트리스와 벽 사이에 15센티미터 정도 공간이 있다. 밤마다 읽는 그림책이 그 사이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곤 한다. 그런데 아이의 손짓에 따라가 보니 엉망으로 뒤엉켜 있던 책들이 세로로 세워져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자신이 해놓은 일에 스스로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이는 침대 위로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나도 웃었다.
내가 화를 내면 아이는 잠시 울상이 되었다가도 슬며시 눈을 들어 내 표정을 살피다 온 얼굴로 웃어버린다. 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도 그런 아이를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가늘게 길어진 눈, 찡긋한 코, 꼬리가 한껏 들린 입, 과장되게 웃는 익살스러운 표정에는 사라졌던 웃음마저 재빨리 돌아오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런데 아이는 엄마가 웃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무언지 아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걸까. 어렵고 힘들고, 화가 날수록 웃어넘기는 게 제일이라고. 그런 순간일수록 여유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스르륵 마음이 풀린다. 화가 났다가도, 짜증이 솟구쳤다가도, 우울감이 넘쳐나다가도, 잠자코 앉아 아이를 보고 있으면 마음에 선한 기운이 고인다. 그럴 때면 아이에게 한 번만 안아줘,라고 말한다. 놀이를 하다가도 아이는 얼른 다가와 나를 안아준다. 이유를 묻거나 의아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그냥 안아준다. 아이의 포옹 속에서 나의 표정과 말투, 행동과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뀐다. 나는 금세 곱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 아이의 등과 엉덩이를 쓸어준다.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계속 걸을 수밖에 없는 하루, 몇 번의 고비를 웃음으로 넘겼다. 포옹으로 거칠어지는 마음을 달랬다. 그러니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건 사랑밖에 없다. 수시로 잊어버리는 그 진실을 매 순간 몸으로 보여주는 존재가 내 곁에 있다.
"내가 고집스레 좋아하는 걸 다른 이가 거북스러워할 때 웃으며 한번쯤 양보해보는 것. 그런 여유와 미소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인생은 괴로운 것. 허망한 것. 황폐한 것. 웃지도 않으면 더 그렇게 되니까."
165쪽,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 이근화, 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