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에서 느낀 정
본 글은 2018년, 글쓴이가 모 포털사이트에 교환학생 생활 중 썼던 포스팅을 가져온 글입니다.
어린 나이에 쓴 글이라 다소 어리숙하고 지금과 다른 가치관과 생각을 가져 지금의 제가 보아도 어색하기 그지없는 글이지만 나누고 싶어 가지고 왔습니다.
2018. 11. 8. 0:57의 글
여행을 다녀온지 어느새 1주일이 훌쩍 넘어 버렸다.
기억이 조금 어렴풋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억하는건
여행 동안 나를 도와줬던 많은 사람들.
그 분들의 친절로 나는 무사히 여행을 마쳤고,
어딜 다녀왔다 보다는 그 분들의 친절이 여전히 마음에 남는 것 같다.
그런, 나가사키는
내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나가사키가 너무 좋았던 건지,
이상하게 3일 머물렀던 나가사키가 오히려 나의 집과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걸로 여행에서 돌아온 한동안 기분이 굉장히 가라앉아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몸살에 걸려서 1주일을 날려먹었다.
그만큼 나가사키는 나에게 있어서
많은 감정과 기억을 남겼다.
우라카미성당-평화공원-원폭낙하중심지-원폭자료관-평화기념관-26인의 순교지-돌아옴
사람들이 부라부라게스트하우스를 찾아오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아침 해를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이틀 내내 구름에 가려져 깨끗한 해돋이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풍경은 아름다웠다.
떠남은 언제나 새로운 만남을 주리라 하며
위로해 왔지만
이곳과의 이별은 좀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틀 지냈다고 익숙해진 이곳을 떠난다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았던 것 같다.
이 날의 아침 공기를 한껏 마시면서
기억해야지 하는 어딘가 이상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모기마을을 새겼다
아롱빵집에서도 샌드위치를 사고
슬쩍
"오늘 돌아가요"
라고 말하니
아주머니가 아쉽다며 지난번에도 당신처럼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이 찾아왔었는데
그 사람은 친구를 데리고 다시 또 왔었다고.
그러다 호쾌한 아저씨가 키친에서 나오시더니
"당신 일본인이지?"
라며 농담을 하셨는데
당황한 나머지
"아뇨아뇨, 한국인이에요"
하며 홀로 진지한 대답을 해버렸다.
누가 봐도 난 한국인인데.
언젠가 여행자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상냥한 이 빵집에
또 오리라.
나도 그 한국분 처럼 친구를 데리고 내가 봤던 풍경들, 먹었던 것들을
보여 줄 날이 오겠지 하며
마지막 커피를 받아 가게를 나섰다.
숙소 근처로 다시 돌아오니 구름이 좀 걷히고 아침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들어가긴 아쉬워
나는 바다 근처에 앉아서 빵집에서 산 메론빵을 먹었다.
나는 호스트 분과도 또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같은 방을 썼던 로한에게 짬뽕집과 내 메일을 적은 쪽지를 남기고
아침을 먹고 있는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며
부라부라게스트하우스를 떠났다.
그리고 로한은 그 짬뽕집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조금 여유롭게 움직이고 싶어서 7시 30분 즈음에 나서서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나는 먼저 피폭의 마리아가 있는 우라카미 성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 멀리에 보이는 우라카미 성당
원폭중심지와 꽤 가까운 탓에
원폭당시 어떤 모습이었을지...
성당으로 향하니,
여기 저기에서 관광 온 사람들이 보였다.
수녀님들도 보였고.
원폭 당시 처참하게 파괴된 우리카미 성당.
지금의 모습은 1959년 재건축한 모습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당 입구쪽에 원폭으로 날아간 옛종루의 흔적이 남아있다.
천주교 탄압 당시 성당을 지을 돈이 없어 여기저기서 기부를 받고,
누군가의 재산을 털어서 힘겹게 지은 성당이건만
원폭으로 파괴되리라고 누가 상상했을까.
국가 지정 사적 나가사키 원폭 유적 우라카미 천주당 옛 종루
1867년에 시작된 '우라카미 욘반쿠즈레' 라 불리는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으로 인해
전국에 유배되었던 우라카미의 가톨릭 신자들은 1873년에 풀려난 후 성당 건설을 계획하였습니다.
1895년, 프레노 신부의 지도로 착공한 우라카미 천주당은 외국인의 기부와 넉넉치 못한 형편에도 농작물을 팔아서 모은 자금으로 석재와 벽돌을 구매하였고, 신자들이 무보수로 직접 운반 및 건축에 참여해 만들어졌으며, 이후 착공한지 19년이 지난 1914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축성 당시의천주당에는 종루가 없었지만, 당시 주임사제였던 우제신부의 계획하에 1925년에 두 개의 탑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에 의해 천주당은 파괴되었고, 북쪽에 있던 종탑도무너져 그 잔해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59년에 우라카미 천주당은 건되어 이 종루의 흔적만이 원폭에 의해 파괴된 구 우라카미 천주당의 피해를 보여주는유일한 유적이 되었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당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여기 저기서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뭐지? 무슨 행사가 있는가 싶어서
지나가는 할머니께 여기 혹시 미사 드리냐고 여쭈니
미사드린다고. 9시 반에 곧 열린다고 하시는게 아닌가.
나는 그대로,
엄청 고민을 했다.
미사를 드릴까.
말까.
신앙심은 이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마음이 편치 않을 때
아주 가끔은 제발로 찾아가는 곳이다.
나가사키에 와서도 성당을 죽어라 찾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학생활이 최근들어 조금 지키기 시작했고,
고작 2개월째지만.
그 원인으로 마음적으로 안정이 필요해서 나가사키 여행을 왔기도 했고..
여기서 미사를 드리면 정말 좋은 기회일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내 모습이 너무 추한데 괜찮을까
3일째 같은 옷..
이런 생각들을 번갈아 가면서 하다보니
어느덧 성전은 사람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나도 뒷자리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이 곳은 그래도
이런 여행자라도 기꺼이 받아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자리에 앉았다.
미사는 한국과 똑같았다.
도중에 신자들 서로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는 것까지.
아쉽게도 나는 성당을 쉰지 꽤 오래되었기 때문에
성체를 모시진 않았다.
일본어로 고해성사를 하는 건 구청에서 재류신청하는 것보다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그 나름 내 자신에게 안정을 찾을 기회였다.
그리고 미사 내내
이 시간 분명 엄마는 한국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겠지.
그리고 난 지금 여기 나가사키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네
하며, 바다 건너에 있는 내 고향의 성당을 떠올렸다.
미사를 마치고 내려오니
당시 원폭으로 파괴되었던 성상들을 전시해 놓았길래 잠시 들렸다.
그 순간을 보았을 성상들을 보니 묘한 감정이 돌았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걸어서 평화공원으로 향했다.
미사 시작 전엔 곧 비가 내릴 것 만 같았던 날씨가
미사가 끝나니 거짓말 처럼 맑아져 있었다.
원폭자료관이나 평화공원이나 거의다 밀집되어 있었기 떄문에
그냥 표지판 보고 발길 닿는 곳으로 가자 라는 생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도착한 원폭자료관
평화롭게 그지없었던 이곳이
원폭낙하 직후에 이런 폐허였다.
생기가 넘쳐 보이지만 어딘가 모를 고요한 아픔를 가지고 있는 나가사키.
가까이서 보니 종이학이었는데
물어보니 이 종이학은 평화를 염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정말 나가사키 여행은 즐겁지만
어딘가가 계속해서 쑤시는 듯한 여행이기도 하다.
다음은 평화공원
사람들은 이 공원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을 지킨다.
나는 나무들 사이로 원폭 중심지가 보이는 곳에 앉아
조용히 바람소리를 들었다.
당시의 원폭으로 파인 땅의 깊이를 표시하는 듯하다
그리고 평화 공원 근처에 당시 나가사키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의 위령비도 있다고 들어
찾아갔다.
꽤 찾기 힘든 구석에 있다.
그래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는 듯,
여기저기에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이 많아서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1910년 일본정부는 「일한병합조약」을 공포하여,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지배하에 둠으로써, 자유와 인권, 귀종한 토지마져 빼앗기여 상황의 수단을 잃은 많은 조선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일본에로 건너왔다.
그 후, 일본에 강제련행(연행)으로 끌려와 강제로동(노동)을 당한 조선사람은, 1945년 9월 15일 일본의 패전당시에는, 실로 2,365,263명에 이르렀으며 나가사키현하에도 약 7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가사끼시 주변에는 약 3만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이 살고있었으며, 그들은 미쯔비시계렬(계열)의 조선소, 제강소, 전기, 병기공장과 도로, 방공호, 군수공사장 등 토목공사장들에서 강재로동(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9일 미군의 원자폭탄투하에 약 2만명의 조선사람들이 피폭하였으며, 그 중 약 1만여명이 폭사하였다.
우리들 이름없는 일본사람들이 얼마간의 돈을 모아 이곳 나가사끼에서 비참한 생애를 보낸 1만여명의 조선사람들을 위하여 이 추도비를 건설하였다.
지난시기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그 민족을 강제로 끌고와, 학대혹사하며 강재로동끝에 비참하게도 원폭에 맞아 죽게한 전쟁책임을 그들에게 사과함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핵무기의 완전철패와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념원하여 마지 않는다.
1979년 8월 9일
나가사끼재일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회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어떤 한국분을 만났다.
내가 사진을 찍고 있으니,
뒤에서 계신 걸 보고
무심결에
"사진 찍으실 건가요?"
라고 물으니
한국어로 "네" 라는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나와 그분은 일면식도 없지만
함께 묵념을 하고
어쩌다보니 나가사키역으로 가는 노면전철을 함께 타게 되었다.
그 분 역시 홀로 여행 중이었고
전철에서 카스테라가 정말 맛있니,
짬뽕 어디가 맛있니 하는 얘기를 주고 받았다.
뒷날에 후쿠오카에도 오신다고 했는데
급한 나머지 메일 주소라도 남겼어야했는데
그러지 못한게 정말 아쉽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남아 다시 커피타임을 가졌다.
돈 계산도 좀 하고
이것저것 하다가
부모님께 보내려고 했던 엽서를 보내지 않은게 떠올라
서둘러 근처에 있는 우체국에 다녀왔다.
70엔에 3~4일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거의 한국에 1주일만에 도착했으니 꽤 일찍 도착한 듯 하다.
그리고 시간이 남아 나가사키 역 근처를 조금 돌아다녔다.
나가사키역은 항상 지나오는 길이라 자세히 보질 못했었기 때문이다.
모기마을로 가는 버스가 오는 정류장을 보며
이대로 다시 모기마을로 가버리고 싶다 라는 생각을 백만번은 더 한 것 같다.
나가사키역 근처를 구경하다가
버스 시간이 딱 저녁시간에 겹치는 탓에
편의점에서 간단한 먹을 거리를 사고
근처에 있는 26인의 순교지를 마지막으로 들리기로 했다.
이치방 시보리 광고 한국이고 일본이고 정말 많이 보인다
저 멀리서 봤던 공동묘지
역에서 10분도 채 안걸리는 거리에 있다
그리고 도착한 26성인순교지
해질녘의 공원은 언제와도 기분이 좋다.
특히 이곳 공원은 언덕 위에 있어서
햇빛이 바로 내리쬐는 탓에 굉장히 따스했다.
일본 26성인 순교지
1597년 2월 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크리스트교 금지령에 따라 오사카, 교토에서 체포된 6명의 외국인과 20명의 일본인이 나가사키에 호송되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26명의 순교는 유럽과 그 밖의 다른 지역에도 널리 알려져, 1862년 로마교황은 성대한 제전을 열어, 26명을 성인으로 추대하였으며, "일본 26성인" 이라 칭하였다.
나가사키시 교육위원회(2015년 설치)
26인의 성인 중에 굉장히 인상 깊었던 것은
11살, 12살의 성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믿음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죽음을 기꺼이 받아드릴 수 있게까지 된 것일까.
사진을 찍다보니 어디서 한국어 기도소리가 들린다.
한국 분들이 성지순례왔나 보다 하고 지나가려는데
한국어로
"저기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래서 "아, 네" 하고 핸드폰을 건내받았는데
다들
"한국인이야?"
하고 놀랜다.
한국인인거 알고 한국어로 말 거신거 아니였구나.
나는 지금 후쿠오카에서 유학 중이고, 혼자 여행왔다 라고 하니
내 세례명을 물으시면서 목포에서 왔다고 하신다.
한국의 아저씨 아주머니들을 보니 갑자기 마음이 찡해졌다.
그 분들의 왁자지껄함이 괜시리 그리웠던 것인지.
나는 사진을 찍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코리안 스타일 조언을 들으며
나가사키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사진 찍는 아주머니 아저씨들 사이로 고양이가 지나가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야옹야옹하시며 고양이에게 말을 거셨다.
그래도 뒤한번 안돌아보고 제 갈 길 가는 고양이를 보시곤
"일본고양이는 야옹도 안하나?"
라며 농담을 하신다.
신호등을 기다리며
마지막이다 정말 마지막이다 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봉이 세개인 미용실이라니 아마 삼봉이가 있을 것 같다
이번 나가사키 여행은
무리한 일정이었다.
무리하지 않기로 했지만, 전체적으로 많은 에너지 소모를 했다.
그로 인해 돌아와서 감기몸살에 걸려 1주일을 고생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에너지 소모는 신체적 에너지 뿐만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정신적 소모가 더 컸었다.
다크투어리즘을 테마로 한 것은 아니었는데
역사에 관심이 많다보니 어쩌다 그런 곳만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로 인해 안정적인 감정선을 위해 간 여행을
더 해일 같이 요동치게 만들어버려
예정과는 다른 여행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나가사키는 내게 많은 것을 남겨준 곳이고,
혼자간 여행 중에 가장 애착이 가기도 한다.
웃기게도 나가사키에서 돌아와 나가사키가 마치 내 집인 것 마냥
나가사키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떠돌이 귀신같은 말을 해댔으니 말이다.
어쩌면 기회가 생기면 또 다시 갈 것 같다.
다음번엔 핸드폰이 박살 나던가 그런 변수는 없길 바라며,
나가사키 여행의 기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