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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르망디 시골쥐 Dec 21. 2023

예술에서의 형식과 과정에 대해

잭슨폴록 <가을의 리듬>에 대해

이명세 영화감독을 좋아한다. 2000년 중반쯤에 감독이 오랜만에 새 영화를 개봉했었다.

유명한 감독이 오랜만에 선보인 영화라 평론가뿐만 아니라 영화에 관심 있는 웬만한 사람들은 그의 영화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야만 했고 이전 작품까지 후한 점수를 주었던 비평가들 또한 의견이 확실하게 나누어지는 현상을 겪어야만 했다.

내놓는 작품마다 아낌없이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 또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도무지 해석이 안되고 무슨 내용을 말하려는지 이해가 될 수 없음에 실망을 했고
생각보다 빠른 시일에 영화관에서 볼 수 없는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물론 항상 기대를 모았던 감독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평과 대중성을 갖추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감독의 영화가 어떠한 문제 때문에 혹독한 비평을 받아야만 했는가이다.

영화라는 장르는 서사를 가져야 한다.

흔히들 사람들은 영화를 볼 때 어떠한 내용이 있으며 그 내용에 대해서 명쾌한 해석이 나오길 기대한다.
때문에 영화를 보는 이들이 가장 주목하고 영화가 훌륭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평가는 서사적 스토리에 대한
해석의 명쾌함의 관심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문제작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서사성에서 결여됐다는 논의 문에 그렇게 혹독한 평을 치러야만 했다.
한 평론에 의하면 내용은 없는 활동사진과 같은 형태를 선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그 평론을 보고 있자니 감독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고흐 이전에 회화들이 서사를 강조했지만, 고흐 이후의 작품들은 회화의 형식에 주목했다. 이 영화를 고흐 이후의
새로운 형식을 내세운 영화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영화의 본래 의미는 'motion picture' 즉, 활동사진이다. 회화로 따진다면 활동사진은 형식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영화가 기승전결을 가진 스토리를 가졌을 때만이 진정한 영화라고 여겼던 사람들에게 영화의 형식에 대해 묻고 본래의 의미를 돌이 킬 수 있는 이 영화를 보고 있자니 마치 추상회화를 보고 있는 착각을 받았고 재현에만 목말라 있던 순간에 새로운 회화의 장을 연 즉, 칸딘스키나 몬드리안 등의 추상회화 작가들이 저 감독과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현이 사라지고, 조성이 무너지고, 서사적 연관이 파괴되는 현대예술에서 작품의 내용은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이렇게 작품의 지리에 관한 최종적 해석을 거부하고 무한한 해석의 놀이를 풀어놓는 현대예술의 구조를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수수께끼"의 은유로 표현하며 "관찰과 사유로 남김없이 밝혀지는 예술작품은 작품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때문에 위의 감독의 작품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혹평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추상회화 같은 새로운 작품이 평가의 논의에 시달리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잭슨폴록이라는 작가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에도 위에 나오는 감독과 같은 고충을 겪었을 것이다.

그의 그림을 두고 여섯 살까지 아이도 그릴만한 작품이라는 말도 있었고 회화 자체를 파괴한 회화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완전히 날려버린 작품이란 평가가 확실하게 나누어지는 평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모더니즘이 등장한 후 "새로운 것은 언제나 더 좋은 것이다."라고 했던 모더니즘의 표상에 맞게끔 잭슨 폴록은 언제나 충실히 그것만을 실행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모더니즘 미술의 영웅이라고 칭송받았던 그의 작품이 실로

"새로운 것은 언제나 더 좋은 것이다."라는 진리에 부합한 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우연이 아닌 과정의 쌓임 혹은 축적

40년대 이후로 예술운동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아방가르드가 전개되었다.

이전에 아방가르드가 추구했던 것이 '전통과의 단절'이었다면 미국의 아방가르드가 단절해야 할 것은 '유럽회화의 단절'이었다.

유럽회화가 재현을 통한 미의 추구라면 이와의 단절을 추구한 미국의 회화는 현실을 재현한 가상현실의 경험이 아닌 감상의 눈에 펼쳐진 사물임을 추구하였다.

그 중심에 서있던 잭슨 폴록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음'이라는 생각으로 명쾌한 해석이 되지 않는 짜증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재현된 실체에 대한 회화에 그들의 눈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재현되는 이미지를 피하려고 들었고 때문에 관람자들이 작품을 보면서 해석이 아니라 경험을 하게끔 만들었다.

이는 <라이프>지의 기자였던 도로시 세어버링이 쓴 그의 인터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와는 거리를 두고 싶습니다. 그런 이미지가 무의식 중에 떠올를 때도 피하려고 애를 써요. 이미지가 작품 전체를 전달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그냥 덤으로 주어지는 그런 겁니다. 꼭 필요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그래도 작품을 끝내고 나면 항상 그런 이미지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그렇게도 이미지가 작품에 나타나지 않게 하려 했음은 유럽회화는 다른 무언가를 창조해 내야 하는 것에서 나온 것보다는 그가 미국의 아방가르드를 충족시켜 줄 만한 작품을 했기 때문에 그 중심에 서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즉, 미국이 예술의 중심이 되면서 갑자기 등장했던 화풍이 아니라 그는 미술교육을 받았던 예전부터 <가을의 리듬>과 같은 그의 대표작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벤튼의 제자로 들어갔던 잭슨 폴록은 스승으로부터 배운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예술작품의 기저에 깔려있던 리듬의 구조에 관한 강조였다.

벤튼은 제자들에게 리듬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작품을 남긴 루벤스나 엘 그레코의 작품을 베껴보라고 가르쳤고 폴록의 초기 작품 또한 그러한 영향이 짙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소용돌이치듯 한 형체를 통해 19세기 미국화가 앨버트 핑크햄 라이더에 대한 경외감을 드러내며

"나의 흥미를 끄는 미국 화가는 이 사람밖에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을 우연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캔버스를 펼쳐놓고 마구 흘린 듯한 기법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미술 교육을 받을 때부터 리듬에 관하여 관심을 보인 잭슨 폴록은 리듬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을 찾던 중 흘리기 기법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깨닫게 된다.

즉, 자신에게 가장 맞는 형식을 찾은 셈이며 그것에 알맞은 내용은 '쉬르레알리슴'이라는 사상이었다.

'쉬르레알리슴'에서도 가장 매력적으로 여겼던 점은 어떤 식으로든 무의식을 이성적인 통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그것은 표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환각제 복용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부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로타주, 데칼코마니 등 계획하지 않은 효과를 노리는 새로운 기법까지 다양했다.

문학에서는 붓가는 대로 무작위로 쓰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의 흐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잭슨 폴록은 새로운 기법을 추구했던 쉬르레알리슴 사상에 매료당했고 자신의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리듬을 새로운 방법인 흘리기 기법을 통해서 작품을 완성시켰고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나갔다. 철저한 계획 속에서 그는 아이러니 하게도 계획이 없는 듯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때문에 그의 작품 탄생 과정을 보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우연이라는 말을 써서 그의 작품을 평가할 것이다.

1950년 사진작가 한스 나 무트가 작업하는 폴록의 모습을 찍고 싶어 해 그의 화실을 방문했던 글을 보면 그의 그림이 계획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커다란 헛간에는 그림이 가득했고, 흘린 물감이 아직 마르지 않은 캔버스가 바닥에 펼쳐져 있었다.

눈부신 한 줄기 햇살이 캔버스를 비추고 있어서 그림을 정확히 알아보는 것은 힘들었다.

작업실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나는 뚜렷한 목표도 없이 그저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폴록은 자신의 작품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물감통과 붓을 들고 캔버스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작품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사람 같았다. 그의 움직임은 처음에는 느렸지만, 점점 빨라지더니 마치 춤을 추는 것과 비슷하게 변해갔다. 그런 움직임으로 그는 캔버스 위에 검은색과 흰색, 그리고 적갈색의 물감들을 뿌렸다.

그가 작업을 하는 동안 나도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아마 한 3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폴록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그런 육체적인 움직임을 얼마 동안이나 지속할 수 있는 것일까?

액션 페인팅하는 잭슨폴록

 잠시 후에 그가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그의 최고의 대표작 <가을의 리듬>

가을의 리듬

그의 대표작인 가을을 리듬을 보고 있자면 가을의 대표색이라고 할 수 있는 낙엽의 색이 바탕에 깔려있고

그의 검정, 흰색이 마치 리듬을 타는 듯 흘려져 있고 곳곳에는 바탕색보다는 조금 연한 색이 뿌려져 있다.

그리고 쉼 없이 뿌려져 있는 빽빽한 틈과는 대조적으로 가상 자리 쪽에는 여백이 자리하고 있어서 액자 같은 느낌이 들게도 하면서 제목에서 느껴지는 가을의 외로움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작업 중인 폴록의 사진을 보면 폴록은 먼저 수직적 형상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함을 알 수가 있으며 그 움직임을 통해서 먼저 세 개의 커다란 인간 형상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을 보이지 않게끔 복잡한 선으로 그 형상을 가리는 작업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움직임들 때문에 그의 회화가 복잡하게 보이면서도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작다고 할 수 없는 캔버스의 부분 부분이 어디를 떼어내서 보더라도 한 작품으로 보일 만큼의 규칙성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그는 재료에서 조차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막대기나 모종삽, 칼 등 새로운 재료에 대한 탬구도 늦추지 않았다. 실로 그가 작업에 사용된 주된 재료인 유화 물감은 불과 20-30년 전에 발명된 것으로 평소 새로운 재료에 대한 갈망을 늦추지 않는 그의 성향과 새로운 재료를 사용함에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잭슨 폴록의 이 작품은 일견 추상적이고 무작위적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우연성과 조절 사이의 섬세한 균형이 존재하며 빽빽이 뿌려진 물감사이에 숨통을 주는 공감을 할애하고 작품을 가장자리는 액자 같은 형식을 느끼게 하는 여백의 미를 줌으로써 균형을 이루게 하고 있다.

결국 그러한 여백이 그의 작품을 혼란스럽게 보이지 않게끔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그가 이미지들을 먼저 그려놓고 그것을 가리는 작업을 하는 것은 이미지들이 작품에서 보이는 것을 철저히 방지하기 위해 그 위에 물감을 뿌리는 작업을 택한 것은 그가 우연한 경유로 작품을 만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이런 작업을 통해서 이미 회화란 재현할 모델도 재현해주어야 할 스토리도 없다는 시대정신에 부합하면서 회화의 재현성 대상성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파괴함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재현을 추상함으로써 숨기는 의도적인 작품 경향은 또 다른 미국화가 척 클로스와 대비시켜 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임을 느낄 수 있다.

척클로스 초상화

척 클로스는 주로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인데 멀리서 봤을 때는 정말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낸 초상화이나 그것을 자세히 봤을 땐 얼굴을 이루고 있는 조그만 마치 추상회화 같은 픽셀이 모여서 큰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잭슨 폴록이 재현된 이미지들을 숨기고자 추상을 선택한 반면 척 클로스는 재현된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추상을 선택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추상을 통해서 이미지가 읽여지고 해석되는 것을 거부하는 반면에 추상을 통해서 이미지를 드러내고 읽히게 하는 두 작가의 작품을 보면 회화의 형식이 작품의 느낌을 드러내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내용은 같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형식의 차이가 같은 내용을 다르게 보여 줄 수 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 회화가 나왔을 당시에도 끊이지 않았던 우연의 논리는 단지 잭슨 폴록이 선택한 내용인 리듬이 흘리기라는 형식을 통해서 보였다는 말을 통해서 우연의 노리는 그만 거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그의 회화를 이야기할 때 무수히 꺼내게 되는 흘리기 비법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색 모래를 흘려서 그리는 그림에서 어느 정도 영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그의 그림에서는 인디언 예술의 대상을 묘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람자들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옮겨 놓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는 미의 개념보다는 성스러운 아우라는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경험의 의미를 느끼게 만든다.

경험이라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가 작품을 하는 과정 속에서 내면의 움직임, 환희 열정 등이 흘리기 기법을 통해서 작품 속에 드러나기 때문에 관람자들은 그것을 체험할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작품보다 더 유명한 그의 타이틀인 액션 페인팅이라는 말을 먼저 인지하고 있고

그가 작업을 하는 영상이나 사진을 접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우리가 그가 어떻게 작업을 하는지 과정에 대해서 알지 못했더라면 그의 작품을 보았을 때 그 경험에 대해서 이해하는 과정이 더디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 과정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으면 그의 작품을 보면서 그가 움직였을 방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예측을 하고 있으면서 움직임을 따라서 물감이 흘려진 방향을 눈으로 쫓아가는 흥미 또한 그의 작품을 경험하면서 느끼는 매력일 것이다.

<가을의 리듬>에서 또한 그런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검은색 물감이 수직적 형상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을 하고 있다.

수직이라고 해서 결코 딱딱한 형상이 아니라 곡선인 형태로 수직적 형상을 크게 세 개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만든 다음 그렇게 규칙적인 형상을 검은색 물감으로 얼기설기한 형태를 만들어 수평적 형상으로 가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캔버스 위의 물감들이 무생물이 아닌 살아 있는 생멍체로써 춤추고 있는 의식을 치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끔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는 가려내기 힘들었는지 아래위로 흰색 물감을 수평적인 형상으로 흘리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검정과의 대비를 통해서 이미지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게끔 철저하게 가리고 있다. 흰색과 검은색 물감으로 작업한 형태에 비해 딱딱한 모양을 가진 갈색 물감의 형태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숫자 1과 같기도 하고 알파벳의 아이(I) 같기도 한 이미지들을 순간 드러내고 있음을 느낀다.

마지막으로는 글을 마칠 때 쓰는 마침표와 같은 형태는 물감을 붓에서 탁탁 털어내는 작업을 통해서 마치 마무리함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렇듯 폴록의 흘리기 기법은 일견 추상적이고 무작위적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우연성과 조절사이의 섬세한 균형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눈으로 그의 그림을 한참 살피면서 선을 따라가다 보면 섬세함에 놀라게 되면서 비평가들이 그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했던 예술에서 제작과정도 결과만큼이나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던 말이 결코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잭슨 폴록의 그림은 나에게 어떻게 나아왔을까.

잭슨 폴록의 작품을 보면서 문득 이 말이 떠올랐다.

"묘사가 불가능한 것은 다른 어떤 때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즉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순간에 존재한다. 회화는 묘사 불가능한 것이며,
회화가 증언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사건 혹은 사건 그 자체이다."

마치 폴록이 그렸던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작게는 그의 작품인 <가을의 리듬>만 보더라도 가을의 리듬이라는 것은 형상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사건일 뿐이다.

크게는 그의 전체적인 작품 경향은 우리가 흔히 들어오던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혹은 미국인들에게는 예술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놓은 영웅 미국인들이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추상 표현주의를 적절하게 작품으로 소화시킨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경향은 시대가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었다.

그때의 예술 쪽의 역사적인 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작품을 통해서 시대가 스스로 드러났음을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처음에 보았을 때도 지금 또한 혼란스러움은 여전하다.
그러나 한 가지 바뀐 것이 있다면 <가을의 리듬>뿐 아니라 다른 무수한 작품들을 제목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문제를 넘어서 그가 표현하고 싶어 했던 내면의 형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회화를 볼 때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형식의 문제임을 느낄 수 있었다.




*참고자료: 진중권의 현대 미학강의/세계 명화의 비밀/폴록과 친구들
cafe.naver.com/nysoho/241
영화 <폴록>




*오늘의 그림

이번 글은 좋아하는 화가 잭슨폴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도 구상을 그리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건 추상이다. 하지만 아직 전시를 진행할 정도는 아니고 기승전결이라면 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에스키스의 단계

나는 추상을 내 알 수 없는 감정의 모호함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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