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선명해졌을 때, 나는 펜을 움켜쥐었다. 손이 떨렸지만 어떻게든 이 기억을 붙잡으려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 순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어떤 날은 1분, 어떤 날은 한 시간. 알츠하이머라는 진단명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임상시험의 부작용이든, 운명의 장난이든, 나는 이미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시간은 내게 더 이상 선형적이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 바라본 창밖 풍경이 언제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2043년일 수도, 2075년일 수도 있다. 기억과 현실이 뒤섞인 시공간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편집증도 망상장애도 아니다. 내가 겪은 일들은 실재했고, 지금도 실재하고 있다.
평생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맞춰 살면서, 관성이라는 이름의 투명한 궤도를 따라 흘러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용기를 냈던 적이 있었다. 세상을 바꿔보려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48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여전하다. 건물은 높아지고 기계는 정교해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그때와 다를 바 없다.
혹시 모든 사람이 나처럼 약의 부작용으로 자신의 과거를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용기 없는 우리가 서로에게서 숨어버린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무서워진다.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으니까.
지나간 세월이 쏜살같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하루하루가 끈적했고, 무료했고, 의미 없이 반복되었다. 일하면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그저 물리적인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아마도 부작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싶어 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살고 싶다. 그래서 글을 쓴다. 버티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다. 변화는 언제든 가능하다.
버텨내면 산다. 죽기 전까지는 아마도. 내 목소리가 아무리 작고 떨려도, 이제는 실천해보려고 한다. 끌려다니지 않기로 결심했다. 시간이 늦었다고 해서 불가능한 건 아니다. 시간이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은 용기였다. 늦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하지만 내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명료함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또 다른 혼돈의 시작이었을지도.
진한과 이화는 내게 점점 낯선 존재가 되어갔다. 그 아이의 모든 움직임이 어딘가 비틀어져 보였다. 마치 우리가 알던 딸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그 아이의 몸을 빌려 우리 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때로는 위험한 환상처럼, 때로는 잔혹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38년간 복용한 치매 치료제의 부작용이 우리의 인식을 완전히 비틀어놓았다는 걸 나는 몰랐다. 진한과 나는 여전히 임상시험을 받은 지 38일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우리가 만들어낸 착각에 불과했다.
이화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 아이가 우리의 치매 치료를 시작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도전특별시'가 저질렀다는 끔찍한 진실들. 매일같이 우리가 늘어놓는 이야기들을 받아 적으며 일기처럼 기록했지만, 진한과 내 현실감은 날이 갈수록 흐려져갔다. 우리가 현실에 머무는 시간은 하루에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화는 우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 평생 일해 온 우리에게 남은 건 오직 그 아이 하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의사들은 현실적인 선택을 조언했다. 부모를 요양병원으로 보내는 것이 이화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만약 내가 그날 이화의 머리를 내리치지 않았다면, 이화는 우리를 요양병원으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화는 그것이 단순한 사고였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와 자신의 삶이 더 큰 위험으로 치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 아이를 옥죄었다.
부모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딸의 생명까지 위협할 가능성. 그 생각은 밤낮으로 이화를 괴롭혔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돌보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 일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이화는 그 진실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마치 운명이라도 된 것처럼,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의사 말에 따르면, 우리는 병원 면담 이후로 현실과 과거 사이의 기억을 이어주는 마지막 끈마저 끊겨버렸다고 했다. 더는 집에 머물 수 없었다. 이화는 우리를 '골든타운'이라 불리는 요양병원으로 데려갔다.
요양병원에서 의사가 우리를 진료한 후, 조심스럽게 이화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정화 님, 전진한 님. 저는 골드타운의 김경애 의사입니다. 이곳에는 두 분처럼 비슷한 분들이 많이 계세요. 함께 연극을 만들며 치료를 받으시면 금방 좋아지실 거예요."
그 순간, 나는 의사의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시공간이 휘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골든타운에 있었던 그 사람이랑 이름이 똑같네. 김경애... 진한아, 너도 기억하지?"
내 말을 들은 진한은 경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시간이 접히고 펼쳐지면서 과거와 현재가 한 점에서 만나는 것 같았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우리를 병실로 안내했다. 이화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실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발작처럼 쓰러지세요. 병원에서 치료와 검사를 수도 없이 해봤지만, 상태는 점점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이화의 말에 경애는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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