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밑의 얼굴들

by 컨트리쇼퍼


달력 위의 숫자들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2103년. 그 네 자리 수가 내 망막에 새겨지는 순간, 세상이 조용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숨을 고르려 했다. 하지만 폐 속 공기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2103년이라니. 그럼 나는 지금 몇 살인가? 계산하려 했지만,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기억이라는 것이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것이었나.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진한이 샤워를 하고 있었다. 그 소리만이 이 순간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증거 같았다. 나는 방 안을 걸으며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주워 담으려 했다.

스물아홉 살. 도전특별시. 청년통행증. 진한과 나, 그리고 누군가 더.

우리가 함께 어딘가로 떠났던 기억이 있었다. 어떤 마을이었을까. 그곳에서 무엇을 했을까. 기억은 물속에 잠긴 듯 일렁이기만 했다. 욕실 문이 열리자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진한이 나타났을 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정화야, 빨리 샤워해. 늦겠어."


진한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마치 오늘이 여느 날과 같은 하루인 것처럼. 하지만 나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정화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진한이 내게 다가왔다. 그의 손이 내 팔을 잡았을 때, 나는 비로소 입을 열 수 있었다.


"진한아... 지금이 2103년인 것 같아... 그런데 우린 분명 2055년에 살고 있었잖아. 그렇지? 그런데 지금이 2103년이면... 우리가 적어도 일흔이 넘었다는 얘기잖아. 부작용이 아니었어. 우리... 정말 늙은 거야."


진한은 내가 임상시험의 부작용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정화야, 이거 분명 부작용이야. 지금이 무슨 2103년이겠어? 내가 방금 거울을 봤는데 우린 멀쩡했어. 늙지 않았다고."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어 화장실로 달려갔다. 미끄러운 타일 바닥에서 휘청거렸지만, 세면대를 붙잡고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은 분명 젊었다. 하지만 그 젊음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어디로 간 걸까.


"진한아, 뭔가 잘못됐어."

"정화야, 일단 출근부터 하자. 이러다 우리 잘리겠어."


출근. 그 단어가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출근? 그런데... 어디로?"


진한도 잠시 멈칫했다.


"... 모르겠네."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이 집이 언제부터 우리 집이었는지, 우리가 언제부터 함께 살았는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기억이라는 것이 이토록 덧없는 것인지 처음 알았다.

문득 옆방이 궁금해졌다.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서자 손이 떨렸다. 무엇이 두려운 걸까. 문을 열었을 때,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작은 아이가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이가 눈을 뜨며 나지막이 말했다.


"엄마... 출근 안 해도 된다니까 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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