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년 11월 4일.
나는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낯선 의사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소리는 물속을 통과한 것처럼 둔탁하게 들렸다.
"안정화 님의 인터뷰 시작합니다."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막혀 있는 것 같았다. 녹화 중이라는 빨간 불빛이 나를 향해 깜박였다. 나의 모든 말이, 모든 침묵이, 심지어 이 순간의 당황조차 기록되고 있었다.
"그동안 어떤 일들을 겪으셨나요?"
어떤 일들이라고? 나는 속으로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입가에 떠오른 것은 씁쓸함뿐이었다.
"너희가 상상도 못 할 많은 일들… 내가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어."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쉰 소리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목소리가 이렇게 늙어버린 것은.
"그럼, 왜 그간의 일들이 고작 38일처럼 느껴졌을까요?"
38일. 그 숫자가 나를 향해 날아와 가슴팍에 박혔다. 정말 38일이었을까? 아니면 38년이었을까? 시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것이었나?
"모르겠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어. 아마 치매 치료 약 부작용 때문이겠지…."
의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동작이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이 약은 오랜 임상시험을 거쳐 검증된 치료제입니다. 약 부작용은 절대 없습니다."
절대 없다고? 나는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내 안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분노였을까, 아니면 절망이었을까.
"그럼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안정화 님, 왜 이 병원에 오셨는지 기억하시나요?"
기억. 그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안갯속을 헤매듯 흐릿한 기억의 조각들을 더듬었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공허함의 가장자리에서 무수한 질문들이 기어 나와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그 모든 혼돈을 가르고, 하나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너무 또렷해서 오히려 믿기 어려웠다. 마치 오래된 사진 한 장이 갑자기 현상된 것처럼.
"그거야… 진한이랑 돈을 벌려고 왔지…"
의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축하드립니다, 안정화 님. 과거의 기억을 바로 되찾으셨군요. 우리 치료제가 이제야 효과를 보고 있군요."
효과라고? 나는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이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무슨 효과? 효과가 아니고, 부작용이라고 몇 번이나 얘기해!"
내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의사는 여전히 나를 환자로만 보고 있었다. 내가 무엇인지, 내가 겪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안정화 님 진정하세요. 환자분께서 여기 왜 오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생각해 보세요."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나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의 선명함조차 곧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기억은 왔다가 갔다가를 반복하는 파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이 치매치료제 임상시험의 피실험자야! 이게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너희들이 또 나를 이런 식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수작이잖아!"
옆에 있던 교수가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더니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분이 하신 말씀이 모두 맞는 것 같습니다. 여기, 논문에 안정화 님의 성함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의사는 놀라지 않았다. 단지 내가 피실험자라는 사실이 아니라, 치료제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났다는 사실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해보세요. 발작적인 단기 기억의 회복인지, 정말 기억이 되살아난 건지 제대로 확인해 봅시다."
교수의 지시를 받은 의사가 다시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기억의 회복이 빠르게 돌아오고 있는 거군요.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혹시 예전에 치매 치료제 임상시험에 참여하셨습니까?"
나는 피곤함에 젖은 눈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이들에게 나는 여전히 실험체일 뿐이었다. 하나의 데이터, 하나의 케이스, 논문의 한 줄일 뿐.
"그래… 그랬지. 그 약 때문에 38일 동안 꽤 많은 돈을 받았어."
38일이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정말 38일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시간은 이미 내게서 의미를 잃어버렸다. 남은 것은 단지 돈과 기억의 파편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뿐이었다.
의사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일그러졌다.
"이 실험은 38년간 진행된 연구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임상시험이죠. 그 덕분에 많은 치매 환자들이 희망을 얻었습니다. 왜 계속 38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 부분을 다시 생각해 보시죠."
38년? 나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온 세상이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38년이라는 숫자가 내 머릿속에서 맴돌며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그럴 리 없다. 절대 그럴 리 없다.
"38일이라니까!!!"
내 목소리가 절규에 가까웠다. 나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38년이라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다는 뜻이었으니까.
교수와 의사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눈빛에서 나는 실험실 속 관찰 대상이 되어버린 기분을 느꼈다.
"임상시험 당시,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이 부분은 계속 추적해서 관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세."
다음 단계라고? 나는 여전히 이전 단계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럼 이제, 현재와 가까운 기억을 되찾아보겠습니다. 안정화 님, 자녀분 이화는 기억하시죠?"
이화. 그 이름이 내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병실 구석에 서 있는 한 청년을 발견했다. 순간, 내 눈이 커졌다. 그 얼굴에서 어린 이화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린 것 같았다.
"이화야? 네가 왜 이렇게 커버렸니? 너도 혹시 정부에서 하는 그 이상한 일을 맡은 거야? 엄마가 말했잖아! 그런 건 하지 말라고!"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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