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일째가 되던 날, 나는 임상시험 중간 검진을 받기 위해 도전 국립병원을 찾았다.
익숙한 병원 복도였다. 반짝이는 바닥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나와 진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의사는 38일 전에 만났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게 늙어있었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들이 마치 세월의 지층처럼 깊어 보였다.
"의사 선생님이 바뀌었나요?"
나는 의아한 마음을 담아 물었다. 의사는 여전히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38년 전과 같은 사람입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늙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아무리 현대 의학이 발전해서 노화 억제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고 해도, 아직 한계는 존재하죠. 우리 의사들이 더 분발해야 하는 숙제 중 하나입니다."
38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농담일까? 그런데 왜 이런 말장난을 하는 걸까? 불편한 기분을 억누르며, 나는 진한과 함께 순서대로 뇌 검진센터로 들어갔다. 좁고 차가운 공간에는 마치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장비에 몸을 맡기고, 머리에 복잡한 회로들이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이제 서서히 잠이 들 겁니다. 모든 생각과 기억을 내려놓으세요."
의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온몸의 긴장을 놓자 마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기억들이 여러 갈래로 나를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언제의 일인지 명확하지 않은,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저 기억이 들어오는 대로, 나는 과거를 되짚어갔다.
"안녕하세요, 안정화 님. 이 임상시험은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을 위한 시험으로, 앞으로 치매 치료제 개발에 중요한 토대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38년 동안 시험을 한다고요? 그게 정말 가능한가요?"
"당연히 가능하죠. 안정화 님께서도 38년간 보상을 받으실 수 있으니, 기대되지 않으시나요? 이토록 확실한 보장은 없으니까요."
그 말에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발그레 웃음을 지었다. 당시의 나는 참 순진했다.
"네, 요즘 세상에 이런 기회는 정말 흔치 않죠. 감사합니다."
"저희가 더 감사드리죠."
의사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 상대방에게 불안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왜 그때는 그 미소 뒤에 숨겨진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나는 내게 이보다 더 큰 불행이 닥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부작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그들의 잘못이다.
"안정화, 전진한 님이라면 충분히 해내실 겁니다. 저희 연구진은 완벽하게 사전 조사를 마친 상태입니다. 이번 피실험자들은 도전특별시에서 광범위한 조사를 통해 선발되었거든요."
처음에는 약물 복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입금되는 돈이 그 불안을 덮어주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 했고, 우리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기억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계절이 바뀌고, 사람들은 변해갔다. 시간은 쉼 없이 흘렀지만, 나는 그 흐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가벼운 부작용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이 진짜라고 믿어버렸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경계에서 나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의 어느 틈새에 있든 상관없었다. 내 기억만큼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비록 그 기억이 나를 속일지라도, 그 속에서 나는 분명히 살아있었다.
시간은 나를 지나쳐갔지만, 기억 속의 나는 그곳에서 매 순간 숨 쉬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설득되었다. 어쩌면 나는 그 시간 속에서, 시간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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