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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컨트리 쇼퍼 Jun 17. 2023

서른, 자취를 끝내기로 결정하다.  

<네 번째 리스트: 워킹홀리데이 비자 신청>

어느덧, 혼자 사는 것이 익숙해질 때 즘.

이젠 정말 관악구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친구와 나는 취준을 1년 동안 겪으면서, 더 이상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까 싶었다. 

말 그대로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긴 터널을 끝없이 달리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매일 술에 취해 살았다. 그때는 그저 술이 좋아서 마시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짧은 시간 내에 즐겁고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을 만들어내는 것이 술밖에 없었기에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같은 똑같은 일상 속에 달라질 수 있는 현실의 벽이 점점 더 거대해지는 것을 마주하게 되었다. 

회사마다 자소서를 열심히 써서 내고, 면접을 봤다. 

다른 사람들은 대기업만 지원했겠지라고 할 테지만 우리는 중소기업 스타트업 지원 안 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낙방이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모든 문제를 우리 탓으로 돌리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자존감은 점점 바닥을 치고 통장 잔고도 바닥을 치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기기보다 돈 앞에서 벌벌 떨었고, 마음의 여유가 없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가난해진다는 말이 딱 우리를 보고 하는 말 같았다. 

연락을 하지 않아, 섭섭해하는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고 멀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삼십대로 들어가는 이 시기가 혹독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은 남과 비교하지 말라고 하지만, 주변은 온통 비교할 것들로 넘쳐났다.

부모님의 한탄과 걱정 속에서 불안감이 쌓여만 갔고, 모든 것이 암울했다. 

청년이지만, 젊음이 있지만, 우리의 희망찬 미래는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이 우울해지면, 이상하게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찾고 위로받고 싶어 진다. 

그래서 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우리와 비슷하고, 힘든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얻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이런 뉴스가 자주 뜨는 것이었다. 

회사를 다녀도 50대가 되면 퇴직하는 시대가 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뉴스를 보면서 인생을 다시 설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새로운 출발은 참 예측 불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이렇게 불안한데, 50대가 되어서 또다시 일 때문에 불안해질 수 없었다! 

그러면 평생 할 수 있는 일. 

그게 뭘까? 그것부터 추려 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일. 

그게 뭐였을까? 

외국에 나가서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해보자고 다짐했다. 



남자친구는 어린 시절부터 미국문화를 좋아하고, 동경해 왔다고 했다. 그래서 대학도 미국으로 갔다. 

7년간 미국에서 살면서 가장 좋아했던 문화 중 하나가, 바버 문화라고 했다.

특히나 클래식한 머리스타일을 좋아한다.  

그는 항상 바버샵에 가서 머리를 잘랐고, 그 공간에 있는 자신이 좋다고 했다. 

처음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바버가 되고 싶다는 남자친구의 말에 당황했지만, 그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 제대로 듣고 싶었다. 

"머리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자르잖아? 그리고 나이가 먹어도 내 바버샵을 차리면 계속 사람 머리를 자를 수 있고, 그리고 난 바버문화를 동경해 왔지만, 겁이 나서 실제로 시작하지 못했어. 그리고 바버가 되면 우리가 원하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살 수 있잖아?"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남자친구는 바버가 되기 위해, 이용사 자격증 학원을 등록했다.    

'그러면 나는?'

나는 오랫동안 투잡으로 뛰고 있던 요가강사를 해외에 가서 도전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어떠한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양가부모님께 한국을 떠나겠다고 선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모하면서도 발칙한 용기였다.

이런 용기들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하지만 딸을 가진 우리 부모님은 이렇게 결혼도 안 시키고 딸을 내보낼 수 없다 하며 반대를 하였다.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었다. 

나는 한때는 비혼주의자였다고 자부하고,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얽매여 살고 싶지 않았던 때가 있어, 부모님의 발언에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한 달 만에 설득당했다. 

어차피 결혼을 한다면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이 아니면 결혼은 안 할 거 같았다. 

그때는 몰랐다. 결혼은 미친 짓이었다. 다른 의미로 말이다.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한 첫 단추였는데, 어떻게 되다 보니 첫 단추를 끼우는 게 가장 힘들었다.

내 인생이 통째로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전의 삶보다 행복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 준비와 해외를 나갈 준비를 동시에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어느 나라로 갈지부터 정해야 했다. 

나와 남편이 좋아하는 나라가 딱 하나 겹쳤다. 

영국이 있었다. 

그래서 영국으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지만, 둘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다음 차선책인 워홀러들이 가장 많이 가는 나라 호주와 캐나다로 시선을 돌렸다. 

만 서른이 되기 전에 일단은 두 나라다 비자를 신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호주와 캐나다 비자를 동시에 신청했다. 

호주는 비자가 일주일 만에 나왔고, 캐나다도 운 좋게 인비를 받을 수 있었다. 

시기만 잘 맞는다면 두 나라다 1년씩 살면서 워홀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 스텝인 

"어느 나라부터 먼저 갈까?"를 선택해야 했다.  

캐나다는 미국 옆에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겨울이 길고 정말 추운 나라였다. 

호주에는 나의 친동생이 살고 있어, 순조롭게 호주에 정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날씨도 온화했다.

오랜만에 나가는 해외인 만큼 첫 나라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단순한 이 고민만 몇 달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8개월이라는 시간을 고민해도 답은 나올 것 같지 않았고,

캐나다 최종합격 비자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호주와는 다르게 생각보다 추가로 낼 서류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비자가 나온 호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제 첫 자취를 했던 원룸방의 계약 만료일 시점이 다가왔다. 

그때 당시에, 우리의 결혼식은 4월이었고, 해외로 떠나자고 한 날짜는 5월이었다.

결혼을 하자마자 바로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내 원룸방이 2월에 빠져야 하다 보니, 3개월간 갈 곳이 없었다. 

남편은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그 집에 들어가서 셋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원룸방 집주인도 3개월 연장은 안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딱 그 시즌이 대학생 입학 시즌이어서 집을 내놓아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단기방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단기방이라도 3개월 이상부터 계약할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5월에 해외로 나가기로 했던 계획을 6월로 미루게 되었다. 

이제는 단기방을 찾아서 살 지역을 구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원래 살던 서울대입구역에서 살까 했지만, 가격면에서 방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왕 서울에 3개월 더 살게 된 거, 내가 그동안 살고 싶었던 지역 위주로 알아보기로 하였다. 


드디어, 3년 만에 나는 자취를 끝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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