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국제공항>
[한국을 떠나기 일주일 전]
일주일 넘게 초 예민상태로 지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겠다고 했는데, 한국에서 버릴 건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왜 그렇게 짐은 많은지...
버려도 버려도 끝이 없다!!
분명 단기방에 이사 올 때, 많은 것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에 불과했다.
몇 날며칠을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까지 짐을 싸도 끝이 없었다.
두 사람밖에 안 되는데... 왜 이렇게 짐이 많은 걸까? 우리는 미니멀리즘을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제 나머지 짐들은 우체국에 가서 국제 소포를 보내야만 했다.
제일 큰 5호 박스를 사용해서 짐을 포장하고, 총 6박스로 선박을 보냈다.
다들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 이민 가니?"
"아니요. 호주에서 1년만 살다 올 건데요?"
"아니, 그런데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가? 그냥 한국에 두고 가."
"괜찮아요."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었던 우리는 35만 원을 내고, 우체국 국제 선박 배송을 선택했다.
사실 이것도 EMS비행기에 비해서는 싼 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짐을 만약 비행기로 보내면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차마 보낼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호주는 지금 겨울이라고 했다.
겨울이면 여름옷을 보내면 될 것 같았다.
엄마는 내 피부가 예민하니 1년 치 로션과 샴푸, 바디로션까지 챙겨서 보냈다.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시부모님께서는 김치 없으면 못 사는 나를 위해서 밑반찬까지 해서 보내주려고 했지만,
호주의 세관이 엄격해지는 바람에 음식은 들고 가지도 못했다.
우체국 직원은 여러 번 우리에게 물어봤다.
"만약 세관에서 검사했을 때, 그들이 이 물건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다시 돌려보낼 수 있어요. 그럼 돌려보내는 돈이 지금 보내는 돈보다 더 비쌀 텐데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잠시동안 고민했다. 어떡하지?
"근데 그냥 일반 물품인데, 잘못된 물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나요?"
"네. 그런 경우가 많아요. 요즘 호주 세관이 제일 엄격해졌거든요.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해요."
우리는 다시 또 고민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박스 하나 빼고는 다 포기하자!
만약에 호주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나머지 박스는 그냥 폐기처분하겠다고 했다.
과연 이게 맞는 선택일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어떤 선택이 좋은 선택인지도 모르고, 그냥 결정해 버렸다.
역시 사람은 잠을 자야 한다.
잠을 자지 않으면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가장 불안했던 요소는 컨테이너박스가 채워질 때까지 우리의 물건들이 언제 출발하는지 도착하는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두 달이 될지, 세 달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적도를 지나면서 내 샴푸와 로션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하루 전]
초 예민상태에 돌입했다. 잠은 거의 자지 못했다.
혹여나 집주인이 태클을 걸까 봐 노심초사했다.
갑자기 집주인이 뜬금없이 연락하더니 오늘 집을 찾아오겠다는 것이었다.
'뭐지?'
대부분 집을 빼는 당일날 찾아오는데, 왜 집 빼기 하루 전에 찾아온다는 거지?
벨소리가 울린다.
"집주인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나는 처음 봤다. 집을 계약할 때조차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던 그녀는 내가 생각한 모습과는 완전히 정반대 었다. 강남 건물주라면 뭔가 우아하고 품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신이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고,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한다.
이건 집주인들이 집을 빼는 세입장에게 주로 쓰는 수법이었다. 당하면 안 된다. 나는 바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나도 경계태세로 들어갔다.
"이거 전등이 왜 이래요? 3개월 전에 제가 분명 새 걸로 바꿨는데?"
"원래 이랬는데요?"
갑자기 전등을 걸고, 태클을 걸기 시작했다.
스트레스가 갑자기 치밀어 올랐다.
집주인은 다른 태클 걸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돌린다.
전화로는 항상 친절했던 그녀가 우리가 집을 빼기 하루 전 날 찾아오더니 돌변했다.
내가 생각한 집주인 이미지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는 이사를 자주 다니면서 집주인의 이중성을 많이 경험했던 터라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나는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보증금은 내일 집 빼는 날 주시는 것 맞으시죠?"
"짐도 빼고, 모든 관리비도 직접 정산하고 저한테 그 영수증을 보내주셔야지, 제가 철저하게 다시 확인한 후에 계좌이체해 줄 거예요. 만약에 수도세, 전기세, 가스비가 다 정산이 안되면 보증금은 돌려받는 거는 일주일 정도 걸릴 수 있어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보증금을 일주일 후에 준다니. 나는 분명 해외로 가서, 그날 바로 돌려받아야 한다고 유선상으로도 얘기했는데, 갑자기 이 아줌마가 딴 소릴 하고 있다.
열이 확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내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나는 굽신될 수밖에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영수증 다 첨부해서 문자 드릴게요."
[한국을 떠난 당일]
오늘 저녁 8시 비행기로 우리는 한국을 떠난다.
밤새 짐을 싸고, 버리고, 그리고 빼먹은 것은 없는지 확인한다.
역시나 잠을 못 잤다. 새벽동안 별별일들이 다 있었다.
"아! 보험.. 보험 들어야지!"
새벽 2시에 여행자 장기 보험을 들었다.
"아. 핸드폰 정지 신청도 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정지한다.
"국제면허증 발급도 해야 하는데!"
한국을 떠나는 날, 아침.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집을 정리하고,
남편은 강남운전면허장으로 달려갔다.
짐을 정리하다가 하나둘씩 해야 할 것들이 생각난다.
"아! 맞다. 수도세, 전기세, 가스비"
가스비는 결제했고, 영수증 확인.
수도세, 전기세는 우리가 완전히 이 집을 떠나는 그 순간 정산 가능.
그러다가 갑자기 해외에서는 렌즈가 비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밖으로 뛰어가 렌즈를 사 온다.
이 작은 원룸에 여전히 정리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오전 11시면 퇴실해야 하는데, 10시가 되어도 완전히 이 집을 비우지 못했다.
부모님과 시부모님께서 도착했다.
우리 부모님 자동차에는 우리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쓸 물건들을 싣고,
(아무리 선박으로 보내고, 버려도, 여전히 남아있는 물건들이 있었다.)
시부무님 차에는 호주에 갈 6개의 캐리어를 싣는다.
(선박으로 짐을 보냈는데도 우리는 무려 6개의 캐리어를 싣고 떠난다.)
역시나 양가 부모님께서도 어마어마한 우리의 짐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셨다.
"너희 이민 가니? 짐이 왜 이렇게 많아?"
그러고도 백팩 두 개와 작은 가방까지 챙긴다.
겨우 1년 살러 가는 건데, 이건 정말 이민 갈 정도의 짐이었다.
모든 짐을 다 싣고, 나는 그런 와중에도 전기세와 수도세를 계산한다.
집주인에게 연락을 하지만 역시나 그녀는 답이 없다.
그저, 그녀가 보증금을 빨리 보내주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미리 예약한 레스토랑에 점심을 먹으러 간다.
저녁만 되면, 남편과 함께 양재천을 걸으면서 산책을 하던 곳이었는데,
항상 가고 싶었는데 이렇게 한국을 떠나는 날 가게 되었다.
부모님들은 음식이 맛있다고 좋아하셨다.
갑자기 지금 이 순간이 그리울 것 같았다.
올림픽대로를 달린다. 한강이 빠르게 지나간다.
인천국제공항이 다가올수록 하늘은 잿빛처럼 뿌옇다. 미세먼지 탓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유 때문에 한국을 떠나고 싶었던 것도 있었는데, 그래도 지금 한국을 떠나는 이 순간
이 모든 것을 눈과 마음에 담고 싶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보내고, 가족들과 함께 카페에 앉아서 담소를 나눴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꾹 참았다.
저녁 4시. 여전히 집주인은 보증금을 보내주지 않았다.
나는 결국,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부동산 직원이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보겠다고 했다. 내가 연락할 때는 대꾸도 하지 않았던 집주인이 부동산에서 연락하니까 바로 보증금을 보내준다.
그제야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부모님과 헤어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랜만에 탄 장거리 비행이어서 한숨도 못 잤다.
그리고 우리는 새벽 6시에 브리즈번 공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