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한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 내게도 옮겨왔다. 엔진 시동을 걸기 직전, 문득 모든 것이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른도의 정적은 마치 잠든 거대한 생명체의 숨소리 같았고, 우리는 그 안에서 도망치려는 두 마리의 작은 벌레에 불과했다.
"진한아, 잠깐만."
내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작게 울렸다.
"네가 말한 그 계획… 이제라도 말해주면 안 돼?"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진한에게 구체적인 계획 같은 건 없다는 것을. 그의 눈빛에서, 그의 침묵에서, 그가 내 질문을 피하려 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듣고 싶었다. 설령 거짓말이라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진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무심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 표정 뒤로 숨은 불안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우선, 도전특별시에 도착하면 이 사람들이 왜 우릴 가뒀는지 알아낼 거야."
그의 말은 공허했다. 마치 종이 위에 적힌 글자가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것처럼. 나는 고개를 숙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그게 계획이야? 누가 친절히 알려줄 것 같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한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럼 뭐 어쩌라고? 우리도 관수나 두리처럼 여기 갇혀서 늙어가길 기다리라는 거야? 난 여기서 썩을 순 없어!"
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차 문에 손을 뻗었다. 답답함과 불안이 뒤섞여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문을 열려는 순간, 전조등 불빛이 무언가를 비췄다.
할머니가 거기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순간 정지한 것 같았다. 시간도, 호흡도, 심장박동도. 할머니의 모습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나타난 환상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차에서 내렸다. 진한의 제지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 발걸음은 이미 할머니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그냥 가자니까! 안정화!"
진한이 내 손을 붙잡았지만, 나는 그를 뿌리쳤다. 할머니의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기억이 선명해졌다. 지하철에서 마주쳤던 그 순간, 할머니의 눈빛에 담겨 있던 무언가를 나는 놓쳤던 것이다.
"할머니… 여기 사시는 분이셨어요?"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그 손의 온기는 예상보다 차가웠다.
"떠나면 안 돼… 제발, 우릴 구해줘…"
구해달라. 그 말이 내 가슴에 무겁게 꽂혔다.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었나? 진한이 뒤따라 나와 소리쳤다.
"구하라니요? 할머니,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 우리예요! 여기 사람들은 다들 미쳤어요!"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읽었다. 절망, 후회,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대한 슬픔.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고, 표정은 살아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진한이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소리쳤지만,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점점 우리에게 가까워졌다. 그때 할머니가 말했다.
"미안하다…"
그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우리도 살기 위해선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단다…"
할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계약이 끝났다는 것, 마을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필요하다는 것,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 모든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 한 마디 뒤로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선택권은 있는가. 모든 질문이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올라왔지만, 결국 소리가 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 그 얼굴에서 나는 우리의 미래를 보았다. 언젠가 우리도 저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누군가를 붙잡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한의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지만, 나는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미 우리에게 도망칠 곳은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이 거대한 순환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를 붙잡아 두려 했던 건,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말씀이신가요?"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분노도, 배신감도 이상하게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미 이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하다, 얘야. 나도 알아. 이게 잘못된 일이란 걸."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진심이 오히려 더 잔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우린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잖니? 다른 외곽지역 사람들도 도전시에서 받는 일자리로 연명하고 있단다. 네가 아직 모르는 게 많아, 도전특별시에 대해…"
지하철에서의 그 순간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친절한 미소, 자연스러운 대화, 흐른도에 대한 이야기.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이었다는 사실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감탄도 들었다. 얼마나 완벽한 연기였을까.
"그러니까…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한 것도 할머니셨나요?"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그게 내 일이었어. 도전시에서 버티지 못하는 청년들을 데려오는 것. 너희가 여기서 돈도 벌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돕는 게 내 역할이었단다."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돕는다고 했다. 우리를 가두고, 약을 먹이고, 늙게 만드는 것이 도움이라고.
"그런데 정화야. 난 널 데리고 오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마을에서 우연히 널 만난 거야! 난 이게 우리의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넌 여기서 살 운명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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