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 현관문 앞에 서 있을 때, 나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며칠 전의 일인데, 아니, 몇 주 전이었나. 기억이 아득한 유년시절의 한 조각처럼 멀어져 있었다. 강제퇴거명령서가 문에 붙어 있었는데, 종이 모서리가 바람에 펄럭이며 찢겨나간 상태였다. 언제 붙여진 것일까. 어제인가, 아니면 한 달 전인가.
내 손가락이 그 낡은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질감이 이상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바스러질 것 같았다. 집이 없어졌다는 사실보다, 이 종이의 질감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일 때문에 집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게 이유였을까.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거리를 걸으며 나는 내 발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발밑의 아스팔트가 물결치듯 일렁이는 것 같았고, 가로등 불빛들이 별처럼 흩어져 보였다. 목적지가 없다는 건 이상하게 자유로웠다. 마치 중력에서 벗어난 우주비행사처럼.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 발걸음은 도전시청 앞에 와 있었다. 건물이 유난히 높아 보였다. 꼭대기가 구름에 닿을 것처럼. 아니면 내가 작아진 걸까. 요즘 자꾸 이런 일이 생긴다. 사물의 크기가 예전과 달라 보이는 것.
도전특별시라는 이름이 우스웠다. 내가 언제 무언가에 도전해 본 적 있던가.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벅찬데. 그런데 이상했다. 내 기억 속 어딘가에는 분명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덤볐던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언제였는지, 무엇에 대한 것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시청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나는 경비원들이 달려와 나를 막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 내 발걸음 소리만 메아리쳤다. 공간이 생각보다 넓었다. 아니면 내가 생각보다 작았거나. 천장의 샹들리에가 아득히 높은 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로비 벽면의 시계를 봤다. 밤 열한 시. 그런데 이상했다. 시곗바늘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여전했다. 아, 내가 잘못 본 거구나. 요즘 이런 일이 자주 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때, 손끝에서 미세한 전류 같은 것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가장 높은 층을 눌렀다. 인간은 원래 높은 곳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누가 그랬지? 예전에 누군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면서 귀가 먹먹해졌다.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들이 아래로 멀어져 갔다. 그 불빛들 사이사이에 어둠이 있었는데, 그 어둠이 점점 더 넓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도시가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처럼.
최상층에 도착했을 때, 복도는 고요했다. 내 숨소리만 들렸다.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숨소리였을까. 가끔 내 것이 아닌 소리들이 들리곤 한다. 복도 끝의 문으로 향했다. 그 문이 시장실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왜 그렇게 확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고리를 돌렸을 때, 놀랍게도 잠겨 있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렇게 중요한 곳의 문이 열려 있다니. 아니면 내가 특별한 방법으로 열었던 걸까. 기억이 흐릿하다.
문을 열자 그가 앉아 있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내가 들어와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는 데 어렵지는 않았죠?"
그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들 때, 나는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순간,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백발의 노인이었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들이 지도의 등고선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의 눈빛은 깊었다. 마치 몇 번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의 눈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눈에서 내가 아는 누군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누구였을까.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청년들을 위한 도시라고 했는데, 정작 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늙은이들이었다. 벽면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금색 액자에 담긴 초상화들이 일렬로 걸려 있었다. 의원들의 얼굴이었다. 모두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의 모습이었는데, 그들의 눈빛은 화가가 정성스럽게 그려 넣은 듯 살아있어 보였다. 마치 액자 속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선들이 차갑고 날카로웠다. 벽 전체가 그들의 시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러니했다. 그런데 잠깐, 나도 늙은이가 아니었나? 언제부터 내가 청년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지?
기억들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모여들었다 했다. 서울이 무너졌던 이유, 세대 갈등, 공존의 실패. 그런 이야기들이 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그게 정말 내가 경험한 일인가, 아니면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가 구분이 안 됐다.
내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그게 정말 분노였을까. 무언가 다른 감정이었을 수도 있다.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그리움이었을까. 감정들이 물감처럼 섞여서 무슨 색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바닥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아니면 투명한 벽이 우리 사이에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봤지만 허공만 만져졌다.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왜 이렇게 쉽게 올라오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의 말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너무 쉬웠다. 마치 누군가 나를 이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이미 이 길을 많이 걸어봤던 걸까.
문득 창밖을 봤다. 도시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 불빛들이 별처럼 보였다. 아니면 정말 별이었을까. 경계가 흐릿했다. 모든 것이 흐릿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언제인지, 내가 누구인지도.
그 순간 나는 알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니면 꿈과 현실이 뒤섞인 어떤 다른 차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이 순간, 이 공간에서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뿐.
"겉으로 볼 때는 시민들을 위한 공간이어야만 했어요. 우리만 특혜를 받는 게 아닌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실내를 채웠다. 공기가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아니면 내가 무거워진 걸까.
"아주 신기하게도 도전시민들은 오랫동안 진실이 거짓이고, 거짓이 진실인지 모르는 상태로 살아왔죠. 그들은 일에만 몰두했어요. 이곳까지 들어온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죠. 그냥 주어진 대로 사는 것 말고는."
말을 하면서 그는 손짓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벽면에 있던 장치들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최첨단 방어 장비라고 했다. 홀로그램처럼 반투명한 빛들이 공중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치 내 기억들처럼.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선택받았다고 했다. 무엇에 선택받았다는 걸까. 어차피 나는 도전시의 소유물이어서,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소유물? 내가 언제부터 누군가의 소유물이 된 거지?
순간, 마치 전기가 나간 것처럼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퓨즈가 끊어진 순간의 정적.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발밑의 바닥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아득히 멀리서 들려왔다.
"억지로 기억하지 마요. 어차피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그 말이 방아쇠가 되었다. 기억의 파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 잃어버린 모든 것들.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는데, 그들 모두 늙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모두 이렇게 늙어버린 게.
나는 소리쳤다.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살게 된 것을, 내 친구들이 늙어버린 것을, 모든 것들을 토해냈다.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실내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침착했다.
"모든 것들은 당신들이 선택했고, 우리가 강요한 것은 어떤 것도 없어요."
그의 말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지나간 시간이 억울하세요? 그건 우리 탓이 아니에요. 우리는 최대한 당신들을 도와주려고 했어요. 탓하고 싶으면 이 사회에 태어난 당신들의 운명을 탓하세요. 아무리 알려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저, 늙은 노인네가 과거에 후회하는 글이라고 생각할 뿐이에요."
늙은 노인네라니.
문득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유리창이 거울처럼 내 얼굴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그곳에는 내가 아는 정화가 아닌, 낡은 노인의 얼굴이 있었다. 주름진 손, 구부정한 어깨,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늙어버린 걸까.
아, 이건 임상시험의 부작용일 뿐이다. 그래, 그럴 거야. 내 실제 나이는 아직...
그는 내 앞에서 책을 찢고 있었다. 종이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하얀 종이 조각들이 눈처럼 내 앞에 쏟아져 내렸다. 각각의 조각에 글자들이 적혀 있었는데, 그것들이 내 기억의 파편들 같았다.
이 책은 뭐지? 왜 그가 이걸 찢고 있는 거지?
기억이 종이처럼 갈라졌다. 파편적으로, 불규칙하게.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어이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억울했을 것이다.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마저 무뎌졌다.
그의 말이 맞는 부분도 있었다. 선택은 우리가 했다. 하지만...
노인시 흐른도에서 펼쳐진 그 일들이 떠올랐다. 죽은 청년들, 방치된 노인들, 외곽지역의 폐허들. 그 모든 게 정말 우리 탓일까. 충분히 포용할 수 있었을 텐데. 도전특별시만 살리려 하지 않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까지 보듬을 수 있었을 텐데.
젊었을 때는 용기가 없었다. 도전특별시가 전부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육신은 늙었지만, 나에게는 지혜가 있고 경험이 있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 딸, 이화가 떠올랐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런 세상에 살지 않게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는 내가 겪은 일을 세상에 알릴 것이다.
그 생각이 든 순간, 내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투명한 벽이 사라진 것처럼. 발가락 끝부터 차례차례 감각이 돌아왔다.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돌진했다.
탁-
무언가 둔탁한 것에 부딪혔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멈췄다.
그리고 퓨즈가 끊긴 것처럼 모든 것이 캄캄해졌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그 공간은 비어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도전시장실에서 나왔다. 문고리를 돌릴 때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생생했다. 복도의 형광등이 깜빡이며 나를 비추었다.
이제 시작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도전시청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시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내가 대체 왜 여기까지 온 거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있었다. 빈 캔버스처럼. 한동안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애를 썼다. 뇌세포들이 희미한 불빛으로 깜빡이는 것 같았다.
아, 생각이 났다.
노인시 흐른도에 다녀왔는데, 폐허가 되어 있었다. 건물들이 무너져 내려 잿더미가 된 풍경. 내가 살던 원룸도 사라져 있었다. 벽돌 조각들과 녹슨 철근만이 그곳에 무언가 있었다는 증거였다. 모든 것이 없어졌다. 이제 나는 갈 곳이 없어졌다.
마지못해 진한이 있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치 물속을 걷는 것처럼.
진한은 아무 말 없이 무사히 돌아온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의 품이 예상보다 따뜻했다. 그리 익숙하지 않은 포옹에 순간 당황스러운 건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평생 친구 사이였지만 포옹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서 몸을 빼냈다.
"정화야."
진한이 고개를 숙이며 무겁게 말을 꺼냈다. 목소리에 무언가 결의가 담겨 있었다.
"우리 결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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