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발레
학원을 더 알아보기 전에 남편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어느 정도 자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오전에 발레를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남편도 바뀐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생각이 전혀 없던 터라 고민을 해야 했다. 일단 어린이집이든 학원이든 알아볼 수 있는 건 최대한 알아보고 정하자 생각했다.
남편이 출근 한 뒤, 아이와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다시 발레학원을 찾기 시작했다. 집 근처에 발레학원은 가봤던 두 곳을 제외하니 다른 두 곳 밖에 없었다. 통화를 해보니 두 군데 다 유아 전문 발레학원이었다. 이사 오기 전 원장님이 제주에서 발레 학원 찾기 쉽지 않을 거라던 말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도시에 있을 땐 성인발레가 많이 대중화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제주는 아직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을 모두 커버해 줄 곳은 단 한 곳. ‘땅콩 발레학원’뿐이었다.
‘땅콩 발레학원’이 내키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잊지 못할 첫 방문의 기억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발레라는 느낌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해프닝이라고 치고, 두 번째 이유가 발목을 잡았다. 상담 차 갔던 첫 수업 날, 레오타드를 입은 게 민망할 정도로 스트레칭과 근력운동만 하였다. 실제로 발레복을 갖춰 입은 사람은 손에 꼽았다. 매트운동으로 발레를 할 준비만 잔뜩 하다 끝나는 느낌. 계속 이런 방식이라면 다른 운동을 찾아보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하고 싶고 좋아하는 발레를 시작만 해보다 포기하기 싫었다. 땅콩발레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너머로 들리는 목소리 여전히 적응이 힘들었다.
“며칠 전에 수업 듣고 갔던 사람인데요… 저기..”
내가 말을 이어나가기도 전에 원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 애기엄마구나. 왜 전화 안 하나 궁금했어요. 그래요. 언제부터 나올래요?”
“그게… 발레를 다니고 싶은데, 지난번에 수업을 들어보니 매트운동만 하더라고요. 물론, 매트운동도 중요한데 저는 ‘바’를 좀 더 집중적으로 하고 싶거든요…. ”
“바?? 바 하지 왜 안 해요. ‘바’ 할게요. 와요. 언제 올 거예요? ”
“네? 지난번 수업 때 ‘바’ 아예 안 하던데….”
“에이, 가끔 ‘바’도 해요. 더 많이 하고 싶다는 거잖아. 그럼 많이 하면 되지.”
“에? 시간표가 따로 정해져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오면 ‘바’ 많이 할게. 그래서 온다는 거죠?”
“아… 아니 제 말 뜻이 그게 아닌데…. ”
원장님은 수업을 물건 사듯 흥정을 하고 있었다. 대화 패턴이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온다고 대답만 하면 돼.’ 딱 이거였다. ‘바’ 수업도 하겠다 하고, 별다른 차선책이 없었다.
“그럼 한 달만 다녀볼게요. 두 돌 다가오는 애기가 어린이집을 아직 정하지 못해서 오전 수업 때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나요? 최대한 다른 분들에게 피해 없도록 해볼게요.”
“여기 애기들 놀 데 많으니까 걱정 말고 와요. 내일 아침 10시 반 수업 있으니 내일 와요. ”
원장님은 소소한 소원을 들어주는 반지처럼 내가 말하는 것은 다 들어주었다. 찝찝한 마음을 가득 안고 내일부터 수업을 듣기로 하였다. 어찌 되었든 발레를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만일 여기조차 없다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진짜 섬에서 또 고립이 올지 모른다.
다음날 오전,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학원으로 향했다. 유모차에서 내린 아이도 첫날의 나처럼 신기한 학원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레오타드로 갈아입고 아이와 간식거리, 장난감을 들고 연습실로 갔다. 연습실 옆에 열려있는 테라스가 있었고, 테라스에서 아이 노는 모습이 보여 수업에 지장은 없을 것 같아 안심이었다. 연습실엔 트레이닝복을 입은 수강생 두 분이 매트 위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또 혼자 발레복을 갖춰 입고 있으니 민망했다. 불신에 가득 차 매트에 자리를 잡았다. 뒤이어 빨간 레깅스를 입은 원장님이 땀범벅으로 연습실에 나타났다.
“왔어요? 나는 아침마다 동네를 한 시간씩 뛰어요. 이제 수업시작 할까요?”
예상치 못한 일이 또 벌어질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원장님의 한 시간 러닝 때문일까. 잔뜩 흥이 오르신 원장님은 신나게 매트 운동을 시작했다. “하낫-. 두-울. 세-엣. 네-엣.”하며 천천히 세던 박자는 어느새 한껏 빨라져 “한.둘.셋.넷.둘.둘.셋.넷.” EDM 리듬으로 향하고 있었다. 뒤에 앉아있는 수강생들은 박자를 따라갈 수 없어 차례차례 나가떨어지고, 나름 열심히 쫓아가던 나는 ‘그냥 혼자 하세요.’ 하듯 넋 놓고 앉아서 원장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잘 놀고 있나.’하고 시선을 돌리니, 테라스에서 놀던 아이도 앉아서 원장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장님은 너무 많이 뛰고 오신 듯했다.
“여러분!!! 뒤쳐지면 안 돼요!!! 날 따라잡는다 생각하고 따라 하세요!!!”
혼자 앞서 나가고 있는데, 뭘 뒤쳐지지 말라는 건지…..
수강생 두 분도 마음을 다잡으셨는지 다시 따라 하기 시작했고, 나도 다시 따라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40분쯤 흐르고 이렇게 수업이 끝날게 분명해 보였다. 그때 원장님의 시선과 거울 속 나의 시선이 마주쳤고, 갑자기 뒤에 있는 바를 가져오라고 했다. 연습실 중앙에 바가 놓이고, 잔잔한 발레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워밍업 이렇게 했는데, 바는 하고 끝내야지. 드디어 바를 잡는구나. 기쁜 마음을 안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처음이지만 순서라도 대충 외워봐야겠다 다짐했다. 음악과 함께 첫 번째 순서 ‘쁠리에’를 하자마자 또 삘을 받으셨는지, 혼자만 순서를 나가고 계셨다. 내가 알고 있던 발레 수업과 전혀 달랐다. 주인장 맘대로 식당 같달까... 애초에 정해진 루틴이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짧은 수업이었다. 10분도 채 안되어 바가 끝이 났고, 원장님은 열정 수업(?)을 마무리하고는 아이 귀엽다며 함께 놀고 계셨다. 원장님의 운동시간에 지나가는 엑스트라 1로 함께한 기분이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원장님은 수강생 모두를 원장실로 불러 따듯한 차를 한 잔씩 내어주셨다. “어때요? ‘바’도 괜찮았죠?” 원장님은 한껏 상기된 얼굴로 모두에게 물었다. 차 한잔 마시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대화가 잠깐 오갔다. 원장님은 수강생들의 안부를 챙기고 이것저것 간식거리도 챙겨주셨다.
모든 것이 ‘뭐지?’하는 의문으로 가득 찼고, 정신없이 영혼이 털린 느낌이었다. 학원을 많이 다녀본 게 아니라 이런 수업이 처음이라 그런 것인지 그냥 이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지러운 오전을 보낸 느낌이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육아와 살림이 정신적으로 평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오늘의 발레는 어땠냐고 물어봤다. 질문을 듣고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음…… 화려하고 정신없지만 마음에 악의는 없는 수업이랄까...” 구구절절 떠들며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남편은 듣자마자 “이상하다는 뜻이네.”라며 바로 요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