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발레 하는 쿠크다씨

레베랑스 Révérence

by 쿠크다


초등학생 때 한창 뽑기 기계에 미쳐 있던 적이 있다. 원하는 캐릭터 하나 뽑으려고 동전만 생기면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넣고 돌렸다. 왜 이렇게 내가 원하는 건 안 나오는지… 꽝이나 다른 캐릭터들이 두 손 가득 담겨야 뽑기에 미련을 버렸다. 다시 시작된 뽑기. 이번엔 발레학원이었다.

빨간 공만 안 나오는 슬픈 현실

엄마의 삶은 생각보다 바쁘고 팍팍하여 포기의 시간은 빨리 찾아왔고, 내려놓고 이 순간을 살아가기로 했다. 분명히 그랬었다. 마음을 접은 지 1년쯤 된 어느 날, 집 근처 도로 신호에 걸린 정차된 차 안에서 밖을 바라보다 또 심장이 나대기 시작했다. 상가 2층에 못 보던 발레리나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그 건물 2층 창문은 미술관 속 그림이 되었다. 그림을 감상하려고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자리에 멈춰 학원 창문을 올려 보았다. 혼자 친숙해져 스쳐 지나갈 때도 '여전히 잘 있네.' 하며 안부 인사를 하곤 했다. 개가 똥을 끊지 내가 발레를 끊겠나. 이번 딱 한 번만 더 도전해 볼까? 고민하는 척하며 마음속 동전을 이미 뽑기 기계로 넣었다.

창문을 그림처럼 늘 바라봤다.

이제껏 행보를 쭉 봐온 남편은 단칼에 반대했다. 전에 다녔던 학원에서 햄스트링이 터져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깁스를 해 병간호에 살림 육아를 도맡았던 그는 발레라면 치를 떨었다. 냉정한 반대도 충분히 이해했지만, 창문에 그려진 발레리나를 정말 잊을 수 없었다. 이번에 도전을 안 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았다. 다친데도 많이 나아졌으니 진짜 이번이 마지막. 무리하지 않고 절대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상담하면서 부상 얘기도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여기가 내 인생의 마지막 발레학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만약 지난번 같은 일이 일어나면 다시는 발레 얘기도 안 꺼내겠다 호언장담했다.


n번째 첫 수업, 도착하고 원장님을 보자마자 '여기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 누가 봐도 발레를 오래 한 사람 같았다. 상담하면서 원장님의 과묵한 모습에서 오히려 신뢰감이 생겼다. 매트 운동을 시작으로 바와 센터 수업이 이어졌다. 근육 곳곳에서 ‘얘 또 시작한다~’하는 곡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관절은 다 뒤틀려 딱딱하게 굳어진 게 분명했고 있는 근육 없는 근육 다 끌어모아 알뜰살뜰한 발레를 했다. 그토록 원했던 매트 바 센터 3종세트였지만 오랜만이라 그런지 참 낯설고 거리감이 들었다. 수업 내내 허둥대던 내 모습은 바람에 휘청대는 개업 홍보용 풍선 같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마음만은 수석 무용수였다. 방방 뜨는 내 마음을 아셨는지 원장님은 틈틈이 무리하지 말라고 얘기해 주셨다. 센터 수업까지 마무리하면서 원장님과 수강생이 마주 보고 짧게 발레 인사인 레베랑스 (Révérence)를 했다.


https://youtu.be/o1eV2Mgc_BI?si=A6bNn2xaQpN0suby

레베랑스는 공연이 끝나고 청중들, 오케스트라에게 혹은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 피아니스트에게 바치는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뜻한다. 처음 해보는 레베랑스라 참 어색했다. 그러나 이 짧은 레베랑스로 원장님께 수업에 대한 감사함을, 다시 만난 발레에게 반가움과 고마움 표현했다. 거울 속에 비친 엉성한 내 레베랑스가 그저 귀엽고 풋풋했다.


"안 쓰던 근육을 많이 써서 내일 생각보다 몸이 아플 수 있어요. 순서는 계속하다 보면 외워지니까 억지로 외우려고 하지 마세요. 다쳤던 다리는 되도록이면 무리하지 말고요." 수업이 끝나고 땀범벅이 되어 나가떨어진 나에게 원장님은 따스한 당부를 해 주셨다. 학원 계단을 내려가는데 한 칸 한 칸 다리가 달달 떨렸지만 얼굴엔 미소를 가득 머금고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비록 레베랑스는 엉성하지만 개다리춤은 누구보다 최고라고!

keyword
작가의 이전글12 발레 하는 쿠크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