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발레 하는 쿠크다씨

입시 준비 클래스는 처음이지?

by 쿠크다

학원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분위기라 수업 난이도가 높지 않았다. 난생처음 발레를 처음 접한 사람도 수업 체계만 잘 따라가면 버텨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비슷한 순서를 오랫동안 반복하는 것에 대한 지루함이 생긴 수강생 몇몇 분이 바 순서를 바꿨으면 좋겠다 건의를 하였다.(누구세요 당장 나오세요) 바로 다음 주부터 원장님은 기본기에 중점을 두겠다 선언하며 전공반 아이들의 수업체계를 적용했다. 예술중학교 준비하는 아이들 수준의 클래스라는 말에 막연히 '예중 입시 클래스면 초등학생들이 하는 동작이겠구나. 초등학생이면 뭐 어렵진 않겠네.'라는 근본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입시시험은 짧은 시간 안에 입학생을 선발하기 위해서 전공생이 갖춰야 할 기본 동작들이 함축되어 있다. 단순해 보이지만 난이도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 초등학생들이라도 발레를 전공하겠다 마음먹었다면 얼마나 오래 배웠겠나. 게다가 어릴수록 유연하다는 사실 또한 잊고 있었다. 원장님은 우리가 키 큰 초등학생인 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첫 수업은 엉망진창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포기하실 줄 알았던 원장님은 의지의 씨앗에 불을 지폈다. 동작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매트 난이도도 올리고, 자꾸 따라 해야 느는 법이라며 수업을 강행했다. 똑같은 턴듀를 다시 다시 또다시. 제대로 할 때까지 반복하는 날도 있었다.

인고의 훈련(?)이 반복되자 수강생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창궐하며 나를 포함해 손에 꼽는 수강생들만 남게 되었다. 서로 말도 안 섞던 사람들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살아남은 최종 합격자들처럼 전우애가 생겨 서로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원장님 집념 덕분인지 불가능하다 여기던 입시 동작들을 얼추 흉내내기 시작했다. 비스무리하게 따라 하는 모습에 감격해 제대로 가르쳐봐야겠다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수강생들이 원장님을 희망고문 한 것 같다.


열정적인 설명과 시범은 머리에만 입력되고 몸으로 출력되지 않아 속상했다. 더 나아지긴 할까 하는 생각과 우울감이 나를 지배했다. 엉망진창으로 하다 집에 오면 ‘아니 이렇게 생겨먹을걸 어떡하나. 어차피 나는 입시를 볼 사람이 아니니까 이렇게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스스로와 타협했다. 그 타협은 원장님과 한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학원에 가면 깨달았다. 약간이라도 발 포지션이 달라지면 원장님은 득달같이 달려오셔서 어떻게든 발모양을 맞추셨다. 올린 다리 각도가 정확한지 매의 눈으로 확인하는 원장님이 진심 각도기인 줄 알았다.


커다란 몸뚱이를 받쳐 올리며 팔다리 하나하나 잡아 가르쳐주셔도 혼자 말짱 도루묵 되는걸 눈으로 보면 허무함이 저절로 밀려왔다. 어쩌겠나 학원 관둘 것도 아니고, 피할 수 없으니 하기로 했다. 우선 엉망인 나를 받아들였다. 같은 동작을 이렇게 열심히 배우는데 꾸준히 늘지 않는 것도 재능인 것 같았다. 오케이. 접수. 내가 뭐 돌멩이도 아니고 계속하다 보면 단 1mm라도 더 올라가고 1초라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손에 꼭 쥐었다.


전에 발레 배울 때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우린 성인이니까 자세만 비슷하게 따라 해도 괜찮아요!" 위로해 줬었다. 발레의 ㅂ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발레를 해보겠다는데, 정교함을 요구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취지였겠지. 각자의 그릇에 맞게 적당히 따라가는 게 학습 목표였다. 그래서 더듬더듬 따라가도 재미있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넌덜머리 나게 입시준비 발레를 배우면서 단순하게 배웠던 동작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 하나둘씩 더해져 정교하게 몸을 쓰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음악과 동작이 동시에 끝나면 그 쾌감 또한 짜릿했다. 가끔 슬쩍 요령을 피우며 사각지대에 설렁설렁하면, 어김없이 원장님이 시선과 마주치고 바로 참된 티칭을 받았다.


나중에 얘기하다 알게 된 사실. 원장님도 수강생들의 버거움을 알고 계셨다. 수업 시작 전에 '이 사람들은 취미로 배우는 사람들이다.' 되뇌지만 수업 시작하면 제대로 가르쳐줘야겠다는 의욕이 앞선다고 하셨다. 발레는 제대로 배워야 다치지 않고 오래 할 수 있다고, 발레를 사랑하는 만큼 오래 하고 싶지 않냐는 말에 몇 번을 다치고 다시 발레를 하는 난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발레에 대한 진심이 심장에서만 폭닥폭닥 뛰고 있다면, 원장님의 발레를 가르치는 진심은 심장에서 시작해 말초신경까지 팡팡 뻗어져 있는 게 분명하다. 숨어있는 나의 발레도 말초까지 뻗어 나왔으면 좋겠다.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전공준비하는 아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대견하다 아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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