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발레 하는 쿠크다씨

늪이 숲이 된 순간

by 쿠크다

론드잠(Rond de jambe)

Rond는 ‘원’, ‘둥글다’를 뜻하고 Jambe는 ‘다리’를 의미한다. 컴퍼스처럼 내 몸을 중심점으로 삼아 다리를 뻗어 발끝으로 앞 옆 뒤로 움직여 반원을 그리는 동작이다. 꼿꼿하게 몸의 중립을 유지하고, 움직이는 다리는 발뒤꿈치부터 내전근까지 꼼꼼하게 움직여야 한다. 다리는 꼿꼿하고 발은 부드러운… 마치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움직인다. 음악이 진행될수록 다리 각도를 올려 바닥에서 그리던 원을 옆으로 크게 그리는 동작이 진행된다.


론드잠의 늪에 처음 빠졌을 때가 생각난다. 엉덩이 실룩거리며 신나게 반원을 그리다 힘이 다 빠져 다리를 거의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 서 있는 다리엔 힘이 없어 무릎도 제대로 못 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내 다리를 잡아 뽑는다는 생각으로 다리에 붙은 관절은 다 펴내려고 아등바등 노력한다.


더불어 제일 좋아하지 않는 동작이었다. 발레에 대한 애정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애증의 동작이랄까. 턴듀처럼 음악이 빠르면 슉슉 동작이 빨리 바뀌기 때문에 몸으로 버티는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 빠른 몸재간은 슬쩍 겉으로 보기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캐치하기 어려워 마음대로 말아먹어도 티가 안 난다. (타조가 머리 박고 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느린 음악은 순서는 동작도 느려지고 잘못된 자세도 티가 많이 난다.


론드잠은 템포가 느린 음악인 데다가 한쪽 다리는 돌리고 나머지 다리로 서고 버티기가 쉽지 않다. 몸의 정렬이 얼마나 비틀어져 있는지 눈에 훤히 보이는 데다가 내 다리가 이렇게 무겁다는 걸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론드잠 음악 끄트머리에 스트레칭이 동작이 섞여있는데, 그나마 혹사하던 다리에게 약간의 쉴 틈을 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론드잠을 요일로 꼽아보자면 목요일이라 할 수 있다. 월요일을 시작으로 정신없이 평일을 보내다 목요일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마음이랄까. 내일이 금요일이라는 즐거움보다는 ‘아직도 목요일이라니.’ 하는 실망과 좌절감을 론드잠에서 느낀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순서들이 쉬운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유독 버텨내기 힘들었다. 가끔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원장님의 시선을 피해 털썩 힘 풀고 마음대로 혼자 쉬엄쉬엄 할 때가 많았다.


싫은 이유만 잔뜩 적었네... ‘차라리 욕을 해라.’싶을 정도로 싫어하던 동작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다. 원래 나는 주관이나 생각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었다. 나의 좋고 싫음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거 같아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이 엄마가 되고 나니 방어막이랄 게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내 경계로 훅훅 들어왔다. 호불호를 표현할 겨를도 없어지니 문득 억울해졌다. 우리 아이는 태어날 때 머리숱이 적었다. 그래서 배냇머리 한 올이 소중했다. 딸아이라 그런지 빨리 머리카락이 자라길 바랐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아이를 보면서 “배냇머리를 빡빡 밀어야 풍성하게 자란다.” 하셨다. 그 후 아이를 볼 때마다 빡빡 밀어야 한다고 거의 빡빡 무새처럼 말하셨다. 처음엔 옅은 미소로 일관했지만 점점 공포로 다가왔다.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 중이었지만 빡빡은 정말.. 싫었다!!! 참다 참다 “으아 어머님, 머리 안 밀거에요. 그거 다 속설이라고요!!” 해버렸다. 어머님은 기억 못 하시겠지만 그게 나의 첫 방패였다.

그 후 학원에서 론드잠을 하는데 다리가 내 영역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나만의 경계를 또렷이 만드는 것 같달까. ‘여기까지가 내 숲이에요.’를 온몸으로 표현하니 속이 후련했다. 유독 얼버무리며 내 의사표현을 제대로 못한 날엔 론드잠으로 만든 나만의 숲에서 안정감을 찾았다.


제대로 론드잠을 하려면 주체인 내 몸이 단단해야 한다. 중립을 유지한 채 안에서 뻗어나가는 힘이 곧고 정확해야 꼿꼿하게 원을 그리고, 다리도 더 높게 들 수 있다. 마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 안의 심지가 곧아야 안에서 뻗어내는 말들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타인을 조심스럽게 대하려다가 오히려 스스로 흔들거리며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도 가끔 론드잠이 지겹고 싫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숲을 그려낸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진다.


아 우리 아이 머리카락은 잘 지켜내서 마음껏 예쁘게 묶어주었다! 휴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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