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발레 하는 쿠크다씨

수업에서 살아남기

by 쿠크다


발레를 외사랑 하고 있다. 내 사랑만큼 발레도 나를 사랑해 줘서 실력이 쑥쑥 는다면 발레 ❤️쿠크다씨 최종커플이 성사될 텐데... 여전히 ‘나는 솔로’다. 취미발레는 이상과 현실의 갭이 크다는 걸 몸으로 직시하게 해 준다. 속상함도 잠시 뿐 재빨리 재미를 찾았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조용히 설명을 듣고 혼자 이것저것 시도하다 얻어걸려 성공하는 소소한 즐거움이랄까. 수강생이 많을 땐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히 발레를 할 수 있어 좋았다. 의도치 않게 소수정예로 수업을 들으며 사정이 달라졌다. 거의 셋, 넷이 수업하니 바 두 개를 거울을 마주 보고 가로로 놓아 수강생은 일렬로 세워졌다. 이렇게 발레를 하면서 원장님의 수업 패턴을 분석하게 되었다.


음악 시작 전부터 원장님 눈에 ‘삡’ 스캐너가 켜진다. 준비 자세를 쭉 훑고 음악은 튼다. 일렬로 서있는 수강생을 맨 앞부터 지나가며 스캔하고 자세를 잡아주신다. 음악이 끝나면 한 명씩 어떤 것을 고쳐야 할지 설명과 함께 몸소 보여주신다. 발레 공장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차례차례 교정을 받을 땐 발레 컨베이어벨트에 놓인 기분이 든다. 원장님은 핸즈온을 하다 순서를 외우지 못한다거나, 동작을 대충 한다 싶으면 가차 없이 곁을 떠나 다음 사람을 코치하러 떠난다. 아차차 하고 틀린 뒤 원장님이 지나가는 게 느껴지면 마음이 씁쓸하다. 틀린 건 어쩔 수 없다. 대충 한다고 혼난 것을 변명을 해보자면 대충 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한 건데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날씨가 궂은 탓에 수강생이 나를 포함해 두 명이었던 날이 있다.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수업 시작 전까지 하염없이 입구를 바라보며 한 명이라도 나타나길 기다렸다. 원장님의 ‘두 명이면 개인레슨 같고 좋지 않냐’는 얼굴에서 광기의 눈빛을 보고 말았다.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 내 모든 세포가 발레를 위해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너무 힘들어서 마무리 인사도 못하고 옷 갈아입으러 튀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하루를 보냈고, 아이랑 놀이터에 놀러 나가 쫓아다닐 힘도 없어 벤치에 누워있던 기억이 난다. 근육통이 너무 심해서 자면서 끙끙 앓았다. 다음 수업 때, 같이 다니는 분들에게 제발 사정이 생겨 결석하면 나도 결석하게 미리 말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남들은 원해서 개인레슨을 받는다 하던데.. 생각만 해도 왕부담스럽다.


이런 시스템이 지속되면서 수업 중 나만의 생존 방법을 찾게 되었다. 바에 설 때 절대 맨 앞, 맨 뒤는 피할 것. 맨 앞자리는 자세가 엉망이면 음악이 끝날 때까지 원장님의 손길이 떠나지 않고, 순서를 숙지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뒷사람에게 넘어간다. 쌩하고 지나칠 때 ‘탈락’는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마음이 쓰린 자리다. 맨 뒷자리도 반대 동작을 하면 뒤돌아 자연스레 맨 앞이 되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중간 자리가 최고다. 순서를 헷갈릴 때 앞사람 슬쩍 커닝할 수 있고, 앞사람의 티칭도 눈치껏 따라 하면 원장님이 별말 없이 나를 지나간다. 중간자리는 맨 앞사람 핸즈온에 집중하다 음악이 끝나면 날로 먹어서 기분이 좋다. 나만의 비결이라며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했더니 다들 날 앞 뒤로 밀어내서 이제 맨 앞, 맨 뒤에 서서 털리게 되었다.

센터를 할 땐, 다른 사람들 서 있는 위치보다 뒷자리 중간에 서는 것이다. 이것도 왼쪽 오른쪽 둘 다 커닝을 할 수 있고 주목을 덜 받아 원장님 시선을 피하는 최적의 자리다. 음악에 맞춰진 동작보다 아주 미세하게 살짝 느리게 따라 하면 순서 외운 사람처럼 보인다. 대놓고 한 템포 느리게 따라 하면 앞으로 나오라며 끌려 나올 수 있으니 ‘미세하게’가 중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또 혼자 사부작사부작 연습할 때 거울 속에 비친 원장님과 눈이 마주치지 않는 것이 마지막 팁이다. 원장님이랑 눈 마주치면 갑자기 다가와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하며 교정이 될 때까지 붙잡고 가르쳐주신다. 물론 아주 감사한 기회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시키는 대로 해서 우연히 잘되면 박수를 받는 건 정말 손에 꼽는다. 아무리 집중 코치를 받아도 이 몸뚱이는 기대를 저버리고 결국 원장님은 멀어진다.


아이를 키우면 형언할 수 없는 촉이 생긴다. 재잘재잘하다 갑자기 조용해진다거나 갑자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다거나 할 때면 어김없이 몰래 딴짓을 하거나 일거리를 만들고 있다. 욱하지만 귀엽기도 해서 다치거나 나쁜 행동이 아니면 가끔은 못 본 척하고 넘어가거나 자기 전에 그게 그렇게 해보고 싶었어? 하고 지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만의 생존 팁들을 원장님은 알아챘지만 넘어간 것 같다. 원장님도 발레키즈를 키우는 느낌 아니었을까. 귀엽게 봐주셨길 바라며 적당히 꼼수 부리고 앞으로는 말 잘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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