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발레 하는 쿠크다씨

by 쿠크다

수업 시작 전에 몸을 풀려고 하나 둘 모여 스트레칭을 하는데, 원장님이 며칠 전 어르신이 성인발레를 문의하러 오셨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긋하신 분들도 종종 상담 오실 때가 많아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 시작했다. 여든이 되셨다는 어르신은 지병이 있는 무릎을 쓰지 않고 폴드 브라 (팔 동작)만 할 수 있나 여쭤 보셨다고 했다. 원장님은 폴드브라라는 단어를 듣고 발레를 예전에 배우신 적 있으시냐고 물어봤다고 했다. 어르신은 발레를 전공했고, 예전에 발레를 가르쳤었다며 제자가 지금 유명한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하셨다. 다른 분은 이름을 듣고 들어봤다며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문외한인 나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당시 발레 전공을 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기했는데 제자가 대학교수라니... 적어도 60년 전에 발레를 시작하셨을 텐데…그 당시에 어떻게 발레를 접하셨을까 궁금했다. 그날 원장님과 어르신은 한참을 대화를 나누셨고, 어르신은 나중에 수업 참관하러 오시겠다 약속을 하고 가셨다고 한다.

수업하려고 바를 연습실 가운데로 옮기는데, 누군가 학원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입구 쪽을 본 나는 그 어르신인 것을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여든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참 고우셨다.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고, 원장님은 수업을 편히 보실 수 있게 연습실에 의자를 놓아주셨다. 갑작스러운 공개 수업에 원장님이 긴장하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눈빛에서 더 엄격한 레이저가 나오는 걸 감지했다. 어르신은 자세를 잡는 우리를 보며 취미로 하는 분들 같지 않다고 칭찬을 해 주셨다. '바로 실망하실 텐데...' 하는 걱정에 나도 괜히 급속도로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긴장이 되어 입이 바싹 말랐다. 비록 엉망진창이겠지만 우리가 얼마나 잘 배워왔는지 그 어르신께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수업이 시작되고 역시나 몸이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았다. 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고 이렇게 긴장될 일인지… 마치 실기 시험장에 선 기분이었다. 몰래 딴짓도 못하고 정신줄 놓을 틈도 없으니 심신이 탈곡기에 들어가 털리는 기분이었다. 원장님도 잘 가르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으셨는지 눈이 네 개 달린 사람처럼 우리를 관찰하고 자세를 잡아주셨다.


수업 내내 지긋이 바라보던 어르신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원장님과 우리의 차이를 짚어 주셨다. 원장님이 시범을 보일 때 눈빛부터 달라진다며 발레리나의 마음가짐이 눈빛에서 읽힌다고 하셨다. 말씀을 듣고 나니 정말 원장님이 시범을 보이실 땐, 설명하실 때와 달리 눈빛이 반짝 빛났다. 나도 따라 해보고 싶어서 동태눈이었던 눈빛을 가다듬고 집중해 보았다. 정말로 마음과 달리 엉망진창이었던 동작들이 약간 가다듬어지는 느낌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몸에 집중하는 방법을 또 하나 배우게 되었다.


어르신은 수업을 마친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셨다. 너무 힘들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박수까지 받으니 더욱 뿌듯했다. 평소에도 발레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는데, 우리를 보며 그 마음을 채우셨다고 하셨다. 성인 발레를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원장님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항상 감사하며 배우라고 하셨다. 발레를 배우는 사람, 발레를 가르치는 사람, 배우고 가르쳤던 세월을 보낸 사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모두가 한 공간에서 발레로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어르신은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들 이야기를 하시며, 당신 삶에 발레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이야기해 주셨다. 발레를 그리워하고 갈망했던 시기가 있어서 그런지 어르신의 마음이 많이 와닿았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세월이 지나 지금 이 순간들을 그리워하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니, 온 힘을 바친 이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또 오시겠다는 어르신은 그 이후로 다시 뵙지 못했다. 여쭤보고 싶었던 질문이 참 많았는데 수업하며 탈탈 털린 뒤라 경청하다 헤어진 게 너무 아쉽다. 홀리듯 발레에 빠져버린 내게 가족들은 언제까지 발레를 할 거냐고 물을 때가 있다. 전에는 “글쎄?”라고 대답했지만 이젠 백발 할머니가 되어도 발레 할 거라고 말한다. 내 꿈의 시작이 된 어르신이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난다. 오래오래 발레 하고 싶은 마음이 더 깊어졌다. 그때까지 발레 하면 근육 짱짱하게 붙고 턴도 휙휙 돌고 막 날아다닐 수 있을까? 아마 난 발레하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수업 틈새로 딴짓하고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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