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발레 하는 쿠크다씨

말라버린 샘물

by 쿠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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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어떤 이유로 발레에 푹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명의 수강생만 생존(?)하게 된 발레 클래스. 열정에 답하듯 원장님도 태풍이 불어도 폭설이 와도 휴강 한번 없이 수업을 열었다. 난이도가 올라가는 속도에 비해 나의 실력은 더디고 더뎠지만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얼렁뚱땅 해내고 있었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수업 패턴도 고착화되었고 그렇게 입시스타일발레를 배운 지 2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다. 졸졸 흐르던 샘물이 고여버린 것 같았다.


소수의 사람들이 같은 레벨로 배워나가니 문제가 생겼다. 반이 따로 나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규 수강생이 생기면 레벨을 맞출 수 없었다. 높은 진입장벽을 느끼고 다들 첫 수업 후 회전문처럼 돌아 나갔다. 한 번은 발레를 배워보고 싶어 손잡고 온 두 사람이 있었는데, 플랭크 다섯 세트씩 하는 걸 구경만 하다 뒷걸음질 쳐 나간 게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다섯 손가락은 충분히 넘는 것 같다. 다들 회전문에서 학원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 슬펐다. 유입이 많아 레벨을 낮추면 나는 땡큐였지만… 원장님도 수강생들도 새로 온 소수를 위해 레벨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쯤에 학원에 자잘한 일들이 많이 생겼었다. 난 새로 온 수강생만 오면 반가워서 늘 들떴었는데 그날따라 수업 중 공기가 이상해 저절로 눈치를 봤던 기억이 난다. 새로 온 분은 수업 중에 계속 한숨 쉬고 시계만 보다 수업이 끝나고 나에게 다가와 격앙된 어조로 "원래 수업을 이렇게 해요??" 하며 물었고, 쫄아서 "원래 이렇게 합니다만..." 하며 도망치듯 학원을 나왔다. 시간이 지나 원장님께 조심스레 그날에 대해 여쭸다. 수업 끝나고 나갈 때도 화가 잔뜩 나있었는데, 전화로 교습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항의해 환불해 줬다는 후문이었다. 학원마다 수업방식이 다르니까 수업이 본인에게 안 맞을 수 있는 건 당연하다. 그렇게 화난 티를 팍팍 냈어야 했을까. 사람마다 각자의 입장이 있다고 하지만, 당시 수업 분위기와 태도 말투를 눈으로 봐서 그런지 그 입장을 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다 같이 즐기고 배우자고 모인 자리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얼마나 미숙한 행동인지 배우는 기회였다.


마가 낀 시기였나…. 유독 그때 자잘한 트러블들이 눈에 자주 보여서 마음이 안 좋았다. 언젠가 눈치만 보다 넌지시 원장님께 "힘드시죠?" 했을 때,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쉽게 내려놓을 수 없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기적인 마음이 먼저 들었다. 반사적으로 수업이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안된다고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다 정신을 차렸다.

솔직히 난 원장님을 많이 어려워해서 길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특히나 열정적으로 질문하는 타입도 아니라 수업 시간에 교정받을 때가 전부였다. 기술적인 이야기가 아닌 원장님의 마음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자세한 얘기를 적어 내려갈 수 없지만, 듣다 보니 딸아이 수영 수업이 생각났다. 수영 선생님이 물속에서 걸어 다니면서 아이들을 가르쳐주시다가 엄청난 접영으로 수영장 반대편으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돌고래 같은 모습에 와…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저렇게 시원하게 수영하는 사람이 하루 종일 걸으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면 가끔은 갑갑하지 않을까? 저 반대편으로 가는 짧은 순간이 얼마나 개운할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원장님에게도 이 클래스가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센터 수업을 할 때 지금 배우는 동작이 작품에서 어떻게 응용되는지 직접 보여주실 때가 종종 있었다. 턴을 돌고 폴짝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알고 보니 요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짤막하게 작품을 보여주시는 게 마냥 멋지고 감사한 마음이었는데, 원장님도 그 순간들을 즐기고 있던 것이었다.


가끔 발레를 이렇게까지 배울 일인가 현타가 올 때가 많았다. 어차피 학원을 나서면 머리 질끈 묶은 엄마이자 아내인데, 왜 이렇게 아등바등하는 것이며 원장님은 뭘 위해서 우리를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서 가르쳐주고 계신 걸까? 가끔씩 들었던 의문도 풀렸다. 발레를 좋아해서 배우는 사람들에게 하나라도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었고, 함께 발레를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하셨다. 그런 원장님이 이런 일들 때문에 수업을 접을 고민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마음이 무거웠다.


다들 한 번쯤 코로나 걸리고 막차 타듯 코로나에 걸려 호되게 앓고 학원에 나갔다. 이상한 공기는 왜 틀린 적이 없을까. 이번 달까지 수업하고 더 이상 성인반 수업은 운영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았다. 듣자마자 '올 것이 와버렸구나.'하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언젠가는 수업이 없어지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에이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해주세요. 저 격리하면서 레오타드도 하나 새로 샀단 말이에요!!!" 나도 모르게 웃옷을 들어 올리며 원장님께 언성을 높였다. 원장님은 "쿠크다 씨한테 제일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셨다. 연습실로 들어가는데 뒤통수가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원장님의 사정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 누구를 이해할 마음의 공간이 없었다. 당장 내가 발레를 못하게 된다는 사실에 점점 화가 났다. 조용히 하라는 대로 하고 열심히 배웠는데,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덩달아 내가 피해를 본 것 같아 괜히 더 억울했다.


아픈 와중에도 발레 못하는 게 한이었다. 세상 비장하게 학원에 왔건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억울하고 허망했다. 더욱 어이없고 속상했던 건 근육이 다 빠져서 힘도 없고 머리가 핑핑 도는데도 발레를 하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여기가 진짜 마지막 종착지라고 여겼는데, 벼랑 끝에서 잡은 동아줄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녔는데…그 동아줄이 끊어진 느낌이었다. 또 떠돌이 신세라니.


수업이 끝날 때까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염치 불구하고 원장님께 다시 생각해 주실 수 없냐고 물었다. 거절하는 눈빛에서 단호함이 느껴졌다. ”오후에 초등반 수업 할 때 올게요. “ 나도 눈이 돌아서 전후 사정 돌아볼 것 없이 밀어붙였다. 2차 거절과 함께 차선책으로 다른 학원을 추천해 주셨다. ”원장님 아니면 싫단 말이에요. “ 집에 갈 때까지 질척 질척 집착의 끝을 보여줬다. 정신 나간 채 하루를 보냈고, 제정신이 아닌 나를 마주하니 오히려 ‘이제 진짜 끝이구나.’하며 마음을 바로잡게 되었다.


원장님을 처음 만났을 때 ‘여기가 마지막이야.’ 하며 벼랑 끝에선 마음가짐으로 다시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발레로 깨어난 내 일상은 멈춘 공장이 다시 가동된 것처럼 활력을 선물했다. 그 시기에 만난 네이버 카페 ‘엄마의 꿈방’에서 손 놓았던 공부도 시작하고 좋은 기회로 발레 글도 쓰기 시작했다. 글 쓰며 발레 하는 즐거움을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발레로 나를 키우며 살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버렸다. 피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미련 없이 놓아줄 용기가 생겼다. 실연당하고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르는 기분이 이런 걸까. 이 기분이 맞다면 발레에게 실연을 당한 게 분명하다. 고여있다 생각했던 샘물이 결국 말라버렸다. 소중했던 수업.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예쁘게 보내줘야겠다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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