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발레 하는 쿠크다씨

마지막 수업

by 쿠크다

며칠 내내 고민하던 나는 원장님이 추천해 주셨던 학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화를 받은 선생님은 커리큘럼을 설명한 뒤, 수업을 먼저 들어보고 등록여부를 결정해도 된다고 했다. 다음 달 첫 수업을 약속하고 통화가 끝난 뒤 학원 규정과 등록 약관에 대한 안내문을 받았다. 메시지로 온 약관들을 꼼꼼히 읽으며 뭔가 체계적인 학원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원장님이 추천해 주신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진짜 마지막 수업이 눈앞에 다가왔다. 막상 운동하려고 나서는 게 운동을 하는 것보다 힘든 것처럼, 늘 발레 가기 직전까지 "오늘 하루만 쨀까?" "잊었던 할 일은 없나?" 하며 온 잡생각에 딴짓을 콤보로 하다가 시간이 촉박해졌을 때 누가 떠밀듯이 나갔었다. 마지막 날은 일찍 미리 가서 얘기도 좀 하고 몸도 풀려고 했건만, 비장한 마음으로 머리를 묶느라 또 헐레벌떡 뛰어나간다. 정신없이 나가는 와중에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다. 눈물 금지.' 짧고 굵게 다짐했다. 학원에 도착해 슬쩍 원장님 눈치를 보다가 추천해 주신 학원에 가보기로 했다고 말씀드렸다. 원장님은 그 학원 원장님께 꼭 자기가 보냈다고 이야기하라고 챙겨주셨다. 버팀목 같이 든든함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진짜 끝이라는 생각에 슬픔이 콧등까지 차올랐다.


마치 다음 주에도 만날 것처럼 자연스레 수업이 시작되었다. 아이와 블록 쌓기를 하는 어른처럼 원장님과 내 몸을 잡고 한 칸씩 쌓아 올리면서 중심을 찾는 법을 되새겼다. 집중하고 발 앞꿈치부터 천천히 몸을 세워 정수리 끝까지 중심축을 단단히 쌓으면 흔들림이 없이 곧게 설 수 있었다. 블록이 하나라도 흐트러지면 세웠던 탑이 기우뚱하듯, 정수리 중심이 살짝만 기울어도 몸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쓰러지고 만다. 몸을 제대로만 쌓아 올리고 더해서 버티는 힘까지 챙길 줄 안다면 훨씬 동작이 안정적이고 턴을 돌 때도 흐트러짐이 없다는 걸 느꼈다. 방법을 알았으니 쌓아 올리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아마 그 학원으로 옮긴다고 말만 안 했다면 평소대로 수업이 진행되고 손뼉 치며 마무리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원장님 눈빛이 수능 전날 마지막 총정리 특강을 하는 일타강사처럼 점점 달궈지는 게 느껴졌다. 동작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신경 하나하나가 나에게 향해있다는 게 느껴졌다. '괜히 말했다...' 하며 후회가 몰려왔다. 어깨에 집채만 한 부담감이 실렸다. 제자가 다른 학원의 수강생이 된다는 게 부담스러우신 걸까.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는 새는 티 나지 않게 보수하는 차원이랄까. 수업 중에 알아채지 못했던 사소한 내 버릇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셨다. 평소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느껴졌다. 마치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맞선남에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주듯, 옮길 학원 원장님에게 나에 대해 하나하나 알려주는 느낌이었다.


이번에 알게 된 고치지 못하는 버릇과 습관들이다.

항상 눈에 초점이 없다. 발바닥부터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눈까지 힘이 올라올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원장님이 "눈!!" 하고 외치면 잠시나마 반짝하고 눈빛이 고쳐진다.

머리 축이 미세하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있다. 원장님이 뒷목을 잡아서 왼쪽 위 방향으로 잡아당겨 주셨다.

거북목에 승모근이 발달해서 집중하면 거울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고개를 앞으로 빼는데, 아직까지도 고치지 못했다.

턴 돌 때 앙드당 앙디올 구분을 2년 가까이 못하고 있다. 수업 후반부로 갈수록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져서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 여태 모르는 거라 변명해 본다. 원장님이 '앙 디올= 바 바깥쪽으로 돌아라. 앙 드당= 바 안쪽으로 돌아라.'라고 주입하면 수업 당일 한정으로 잘 따라간다. 다음 시간에 물어봤는데 또 모르지만 원장님은 해탈한 것 같다.

이것도 이제 다 내 몫이 되어버렸다.


품에서 끼고 키우던 아이를 처음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날 밤의 마음처럼, 원장님은 '필요한 게 또 없나.' '가서 잘 지내려나.' 노파심 가득한 마음으로 짚어주신 것 같다. 그 교정해야 할 포인트와 사소한 버릇들을 몸과 마음속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 덕분인지 한동안 나를 지배했던 불안함이 사그라들었다. 원장님의 믿음처럼 나도 '앞으로 잘 해내야지.' 하며 나를 믿게 되었다. 그렇게 가방 메고 밖으로 나서는 어린아이처럼 학원 밖을 나서서 다른 세상으로 향했다.


무소의 뿔 같은 발레 외길인생을 동경해 원장님을 많이 따랐던 것 같다. 명확한 본인만의 철학을 어떤 상황이 와도 타협하지 않는 모습이 참 멋졌었다. 발레를 배우면서 세상 팔랑거리는 깃털 같은 내가 몸에 단단한 심지를 심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나가는 법을 연습하는 동안에도 늘 발레가 함께 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감사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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