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발레 하는 쿠크다씨

고집쟁이 딸

by 쿠크다

발레 작품 중에 고집쟁이 딸이라는 작품이 있다. 가장 오래된 전막 발레 중 하나로, 유쾌하고 코믹한 분위기의 로맨틱 코미디 발레다. 농장에서 엄마와 살고 있는 주인공 리즈는 가난한 농부 콜라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엄마는 콜라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부잣집 아들 알랭과 결혼시키려 한다. 리즈와 콜라스는 엄마의 방해를 피해 몰래 만나 결국 사랑을 인정받아 결혼에 성공하는 고집쟁이 딸의 이야기다.


우리 집에도 고집쟁이 딸이 하나 있다. 아기 때 젖병과 분유를 거부해서 모유수유를 13개월을 했다. 그 얘기하면 대단하다고 하지만 순전히 아기의 고집 때문이었다. 다 뱉고 울기만 하는데 당해낼 엄마가 있겠나. 의사의 권고로 마음 잡고 단유 하던 날도 잊지 못한다. 밤새 울어서 남편과 이틀밤을 꼬박 새웠다. 임신했을 때 꿈에 부풀어 산 유모차는 타자마자 거부해 두 번 억지로 태우고 중고마켓에 팔았다. 에너지는 얼마나 넘치는지… 두 시간 가까이 자장가를 틀어놓고 낮잠을 재우면 30분 만에 풀충전이 되어 깼다. 놀이터에 나가면 해가 질 때까지 안 들어가려는 아이와 기싸움을 했고, 늘 우는 아이를 보쌈하듯 둘러업고 집으로 향했다. 조금 더 성숙한 엄마였다면 그 고집을 좀 더 유하게 헤쳐나갔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마냥 울고 떼쓰는 아이가 너무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아이에게 바라는 게 딱 하나 있었다. 같이 발레를 배우는 것. 아마 딸 가진 엄마들의 로망 아닐까.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아이가 네다섯 살이 되면 꼭 발레를 시키고 싶었다. 귀염 뽀작한 발레복 입은 모습을 상상해 왔고 적어도 초등학교 때까지 쭉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여러 발레학원을 거치며 우여곡절을 겪는 사이 아이는 다섯 살이 되었고 바로 발레학원 유치부에 등록했다. 아이도 기대에 부풀어 발레복을 골랐고 예쁜 학원 가방을 받아 들고 세상 신났었다. 뭣도 모르고 한 달은 신나게 다녔다. 그 후 어느 날부터인가 다리가 아프다. 등이 아프다. 발레복이 불편하다. 타이즈가 불편하다. 등등 갖가지 핑계를 대며 가기 싫어하기 시작했다. 샤랄라 한 발레복에 혹해 시작한 발레가 생각보다 혹독하다는 걸 뒤늦게 눈치챈 것 같았지만 낙장불입이었다. 나도 순순히 아이의 말을 들어주기 싫었다. 학원까지 가는 날마다 실랑이를 했다. 어떤 날은 질질 끌고 들어가 밀어 넣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온 날도 있었다. 그놈의 로망 실현이 뭐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할 일도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 아이가 군말 없이 잘 다니기 시작했다. 잘 적응해 다행이라는 안도 뒤에 갑자기 바뀐 태도에 수상함을 감지했다. 조용히 알아보니 요 쪼그만 꼬맹이가 수업 시간 전에 선생님한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수업 시간엔 앉아만 있다가 막판 놀이 시간에만 놀다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무 기막혀서 화도 안 나려던 찰나에 학원비가 생각나서 분노가 치솟았다. 그 돈이면 내가 다닐 수 있는데!!!! 그만하자 그만해! 눈물 쏙 빠지게 혼 한바탕을 하고 난 뒤, 아이의 고백이 시작되었다. 스트레칭이 재미없다, 끝나면 배가 아프다 등 많은 불평보다 유독 마음에 꽂히는 말이 있었다. 자기가 언니들보다 덩치가 커서 다니기 싫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또래보다 키도 크고 살집도 있지만 어리니까 신경 쓰지 않을 거란 나만의 착각이었다. 벌써 거울 속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나이가 되었다니. 자칫 자신에 대한 잘못된 신체상을 심어주게 될까 우려되었다. 로망이고 나발이고 일단 아이가 건강한 신체상이 확립된 후 좋아하는 운동을 배워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다른 운동을 찾아보기로 하고 아이의 발레는 약간의 분노가 더해진 채 마무리했다.


그 이후 유치원에서 줄넘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발에 자꾸 걸리는 줄넘기를 잘하고 싶다며 내게 유치원 버스 마중 나올 때 꼭 줄넘기를 챙겨 나오라고 신신당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버스에서 내리며 하는 첫마디는 "엄마 줄넘기 챙겼어?"였다. 뜨거운 여름을 지나 추운 겨울이 올 때까지 아이는 유치원 끝나고 거의 매일 줄넘기를 했다. 성에 안 차거나 줄넘기가 잘 안 되는 날은 줄넘기를 발로 밟고 울면서 뛰는데.. 저 아이가 내 뱃속에서 나왔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열개도 못 뛰던 꼬맹이가 거뜬히 2단 뛰기까지 하게 되었다. 고집불통 수식어가 집념왕으로 바뀌던 순간이었다.


예전엔 발레복 입은 엄마 모습만 봐도 "나도 얼른 엄마처럼 이렇게 발레 할 거야!" 했지만 이제 아이는 엄마의 발레를 한걸음 떨어져 응원한다. 많이 아쉽기도 하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아이와 내가 가는 인생의 방향이 다르다는 걸 그때 많이 배우고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나 위험한 일 아니면 대체로 아이가 하고 싶은 목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지지하는 게 내 역할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밤에 학원으로 나서는 나를 보면서 아이가 "엄마는 발레가 그렇게 좋아?" 하고 물어보면 "최고 좋지. 네가 에그박사 좋아하는 만큼 좋아해!" 하며 신나게 나간다. 이렇게 서로의 취향을 응원하고 존중하는 사이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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