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컨셉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마주하게 되면 저마다 자신만의 속도로 적응해 나아간다. 나는 어색함을 참지 못해 쌉 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다. 혼자라도 주절거려야 불안한 마음이 진정된다. 아이가 자기 직전까지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이유를 드디어 알았다! 역시 콩 심은 데 콩이나 건가. 근데 우리 집은 새로운 환경이 아닌데 왜 계속 말하지.. 집이 어색한가...
작년 가을에 수업이 사라져 학원을 옮겼다. 폐강이 되는 과정도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았고, 작은 어항에 혼자 살던 물고기 같던 나는 갑자기 뜰채로 훅 떠져 큰 수조로 옮겨 적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그 모든 상황이 섭섭해서 나 혼자 흥!! 하고 삐쳐있었다. 그래서 새로 간 학원에서 나만의 시위 같은 느낌으로 묵언을 선택했다. 인사와 짧은 대답 이외에는 묵언으로 일관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뭐 '말수가 없는 분이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새 환경에 적응하려면 신체적, 정신적 소소한 에너지를 쏟아야 하지 않는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입 다물고 있으니 그 에너지를 발레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내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에너지들이 안으로 방향을 바뀌니 좀 더 목표를 명확하게 잡고 발레를 할 수 있었다. 과묵한 사람들이 왜 대부분 진중한 스타일인지 아주 조금이나마 알 거 같았다. 사실 새 학원 다닌 지 한 이틀쯤 되었을 때부터 그 삐친 감정은 다 날아갔다. 마냥 해맑아져서 원래 살던 대로 살아야겠다 하던 찰나에 묵언의 장점에 푹 빠져버렸다.
오 이 콘셉트 좀 좋은데?
좋았어!! 이렇게 과묵한 콘셉트로 밀고 가자!!
과묵한 발레 은둔 고수 이런 느낌을 지향점으로 삼아 혼자 콘셉트를 정해버렸다.
엄마의 삶은 과묵할 수가 없다. 특히나 수다쟁이 딸아이의 엄마는 더더욱. 계속 말하고 또 말하고 안 들으려고 엎드리면, 엎드려있으면서 들으라고 한다. 하다 하다 똥 싸면서 들으라고 화장실 문 앞에 앉아 조잘거린다. 마냥 경청만 하면 좋으련만 적당한 리액션과 추임새를 넣어야 한다. "그냥 듣는 척하는 거지?" "나 누구랑 얘기하는 걸까?" 하며 섭섭해하면 또 그건 엄마로서 미안하고 마음에 남는다. 방청객이 왜 돈을 받는지 납득이 된다. 기가 아주 많이 빨린다.ㅎㅎㅎ 발레 가는 날은 특히 저녁 챙기고 함께 숙제하고 책 읽고 목욕까지 단숨에 끝내고 학원으로 튀어가야 하기 때문에 나도 쉴 새 없이 아이에게 채근한다. 훈련소 교관처럼 "자 지금부터 빠르게 해치운다 실시!!!" 하면 "예!! 충성!!" 하고 빠르게 따라오면 얼마나 좋을까.. 세월아 네월아 "엄마 숫자는 왜 생긴 걸까." "한글이 없는 나라는 어떨까." 막 이러고 앉아있으면 아주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런 날은 "같은 성씨끼리 알아서 하슈. 이 씨는 떠납니다." 하고 도망간 적도 있다. 맨날 도망가니까 이제는 같은 성씨끼리 알아서 잘한다.
저절로 에너지가 방전되어 학원에 가면 말할 힘도 없다. 콘셉트고 나발이고 입을 떼기도 싫다. 절전모드가 되어 약간의 에너지로만 근신하는 기분이다. 그래도 남은 에너지로 '나는.. 은둔.. 고수다..' 하며 이미지트레이닝을 한다. 근데 문제는 애티튜드는 카리스마 가득한 최민수인데 발레를 소위 말해 겁나 못한다는 것. 선생님도 지적할 게 너무 많으니 아예 그냥 내 옆에 계속 머무르셨다. 언제는 선생님이 조용히 내 귀에다 대고 "쿠크다 씨, 그만 좀 틀려라." 하셔서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발레 클래스 시간은 갓난아기가 뛰어다니기까지 과정의 축소판 같다. 기저귀 차고 응애응애 누워있던 아기가 책꽂이 잡고 일어서듯 매트에서 누워있다 일어나 바를 잡고 기본기를 익힌다. 센터에서는 손을 떼고 걸음마 연습하듯 바 없이 동작을 하고, 턴- 스몰 점프- 그랑(크게) 점프 순서로 마무리한다. 나는 총체적 난국이지만 특히나 점프가 아주 쥐약이었다. 다친 뒤로 잘 뛰지도 않았고, 예전 학원에서는 재부상 방지를 위해 점프를 거의 빼주셔서 할 기회가 적었다. 세상은 내 위주로 돌아가지 않기에, 뛰지 않을 수 없다.
스몰 점프는 제자리에서 뛰기 때문에 많은 공간 차지가 없어 수강생이 우르르 나와서 같은 박자로 뛰게 된다. 줄넘기 뛰듯 제자리에서 뛰는 게 뭐가 어렵겠나 생각하겠다만 복잡한 원리가 있다. 발바닥 전체로 바닥을 밀어내듯 뛰어올라 공중에서는 발목을 곧게 포인으로 만들어야 보다 가볍게 뛸 수 있다. 이것만 생각하고 뛰기도 벅찬데 발위치를 계속 바꿔야 한다. [1번 발로 네 번 2번 발로 네 번] 이런 식으로 같은 발 모양으로 반복해서 뛰는 건 양반이다. [1번 발 네 번 2번 발 5번 발 번갈아서 네 번] 이렇게 발 순서가 섞여나가기 시작하면 '그래서 뭐 어떻게 하는 거라고요??' 하며 머릿속이 쥐가 나고 몸에 과부하가 온다.
원래 음악이 시작되면 모두가 한 몸처럼 같이 점프를 해야 하는데, 과부하가 온 나는 혼자 크레용팝이 된다. 정말 한 번도 크레용팝 아닌 적이 없었다. 내가 크레용팝이 되어버리면 옆 사람들 또한 혼돈에 빠져서 파도타기처럼 하나둘 크레용팝이 되었다. 너무너무 민폐다. 폐 끼치기 싫어서 스몰 점프 시간이 되면 제일 구석으로 숨어 들어갔다. 내 머리만 혼자 쑉 튀어나오는 수치를 계속 당하면 "나 혼자만 개판이네.."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이상은 카리스마 장착한 과묵한 은둔 고수이지만 현실은 조용한 크레용팝이다.
스몰 점프만 얘기하면 그랑 점프가 섭섭해하니까 그랑 점프 이야기도 해야겠다. 학원에서는 "줴떼 뛸게요!" 한다. '줴떼'는 불어로 '던진다.'라는 뜻인데 다리를 던지듯 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줴떼 앞에 '그랑'이 붙으면 '그랑 줴떼'가 되는데 그랑은 Grand처럼 '크다'라는 뜻으로 '크게 다리를 던진다.'가 된다.
이렇게 뛰는 것이다. 물론 나는 전혀 저렇게 뛰지 못한다. 세로로 일자 스트레칭이 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선생님은 매번 말씀하시는데 아무래도 뻥 같다. 바닥에서도 일자가 안되는데 저게 될 리가 있나. 저게 되면 사람들이 저렇게 뛰어서 집에 빨리 갈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안되니까 자전거나 차가 발명된 거 아닐까 뭐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랑쥬떼는 맛집 줄 서기 하듯 한 줄로 쭉 서있다 한 명씩 넓은 연습실을 가로질러 뛰어야 한다. 다른 분들은 착착 알아서 순서대로 튀어나가 뛰는데 이상하게 용기가 안 나 머뭇거리게 된다. 그럼 박자를 또 놓치고 그러다 가끔 내가 뛰려고 할 때 음악이 끊겨서 무반주로 점프를 한다. 해보니까 이게 더 수치스러워서 이젠 나도 착착 준비를 하고 뛴다. 혼자 뛰니까 다른 사람이랑 엉킬 일도 없고, 그냥 혼자만의 자멸이니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모두가 바라보는데 혼자 넓은 연습실을 뛰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스몰점프할 때 크레용팝에 비하면 뭐... 문제가 너무 많아서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글을 쓰다 그랑점프 꿀팁을 찾았다. 순서를 기다릴 때, 맛집 웨이팅을 두 시간쯤 했다고 생각하며 서있는다. 그리고 내 순서가 되었을 때 '어머 드디어 내 차례네!!' 하며 식당에 입성하는 기분으로 뛰면 좀 더 높고 멀리 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과묵한 은둔 고수 콘셉트는 물 건너간 것 같다. 그냥 살던 대로 은둔하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