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까스와 카즈하
초등학생이 된 아이의 첫여름방학 때였다. 징하게 길고도 길었다. 시계가 고장난건 아닐까 의심도 했었다. 어린이집, 유치원 때는 방학이라고 이곳저곳 데리고 다녔... 나? 생각해 보니 그때도 안 다녔구나. 여하튼 학교 공사 때문에 방과 후 교실도 없고, 방학이라고 특별한 계획도 없이 보냈다. 방학의 큰 문제점은 점심을 학교에서 먹고 오지 않는다는 것. 아이는 학교에서, 남편은 회사 식당에서 영양사 선생님의 균형 있는 식단으로 한 끼를 채우고 온 사람들의 저녁 밥상은 큰 부담이 없었는데... 방학을 하니 참 부담이 되었다. 맨날 점심을 걸뱅이처럼 대충 때우던 나는 어깨가 무거웠다.
방학 첫날 "점심 뭐 먹을까?" 하는 나의 말에 아이는 "돈까스 먹자!" 했다. 첫날은 그래그래!! 하며 돈까스 맛집에서 포장해와 맛있게 먹었다. 다양한 식단을 해주려고 블로그도 찾아보고 장 볼 목록을 적어 같이 마트에 갔는데, 우리 아이는 어김없이 돈까스를 집었다. 아이가 돈까스 폭격기라는 사실을 그때 눈치 깠어야 한다. 계속되는 돈까스 공격에 마트에서 산 돈까스는 일주일도 채 안되어 동났다. 그리고 피카추 돈까스, 미니언즈 돈까스, 동그란 돈까스, 네모난 돈까스, 치즈돈까스 등등 마트에서 파는 돈까스란 돈까스는 다 쟁였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모양만 바꾼 돈까스를 질려하지 않고 거의 매일 먹었다.
그리고 질려 버린 건 나였다. 내가 요리를 잘 못해서 그냥 돈까스만 먹는 게 아닐까 의심도 했었다. 모처럼 외식을 하려고 해도 감자탕집에 가면 "돈까스 먹을래." 일식집에 가도 "이 집은 히레카츠가 맛있지." 하면서 돈까스를 고르는 아이를 보고 "얘는 진짜 돈까스 폭격기가 맞는구나...."깨달았다. 그렇게 돈까스에 지배되어 두 달을 보낸 나는 어깨는 말리고 목은 튀어나오는 현대인의 진화를 겪고 있었다.
발레 수업 때마다 늘 지적받는 게 어깨와 등이었다. 바뀐 학원에서도 처음엔 슬쩍 오셔서 어깨를 잡아 뽑아주셨다. 바, 센터 할 때 큰소리로 "어깨 펴세요~" "등 판판하게 펴세요~" 외치셨다. 모두에게 외친 것이지만 등이 굽은 자는 알 수 있다. 나를 겨냥했다는 것을... 선생님의 "등 굽지 않아요~"는 "등 펴세요~" "등에 힘주세요!" 등 다양한 버전으로 변형이 되었고 나중에는 "등!"만 해도 자동으로 등 자세를 바로 잡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어깨와 등을 펴보고자 모델처럼 당당하게 걸어도(밤길이라 괜찮다는 합리화) 이상하게 엘리베이터 타고 현관문만 열면 이상하게 다시 굽는다. 굽은 등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얼굴은 선녀인데 몸은 나무꾼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등근육 만들기에 돌아있는 나에게 이 사진은 충격이었다. 올록볼록 엠보싱 뽀삐 같은 등근육.. 탐나는 저 등근육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걸까 싶어서 찾아보다 르세라핌이라는 그룹에 멤버 카츠하라는 걸 알았다.
전에 다니던 발레학원에 일본인 회원님이 있었다. 어느 날 그분이 BTS의 소속사에 발레리나였는데 걸그룹 데뷔를 하는 일본인이 있다고 한 적이 있다. 타국에 사는 일본사람이고 또 발레를 시작하니 동질감이 생겨서 그런지 더 눈길이 간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등근육 사진의 주인공이 예전에 들었던 그 걸그룹으로 데뷔한 발레리나라니... 데뷔한다고 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대스타가 되었있었다. 발레리나로써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네덜란드에서 유학을 하던 학생이 오디션에 합격해서 K-Pop스타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소설 같고 멋졌다. 요즘 아이돌은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나이가 되어버렸지만, 발레라는 주제가 내 뇌리에 박히니 저절로 관심이 갔다.
카츠하의 브이로그, 무대영상 같은 것을 가끔 보면서 그녀의 삶을 학습했다. "여보 카츠하는 스트레칭 할 때 저런 걸 쓴데." 하며 네이버 쇼핑 화면을 들이밀고. 운동을 하면서 "이건 카츠하 복근 운동이래." 아침에 요거트를 먹으면서 "여보 이건 카츠하가 먹는 요거트래." 하면서 카츠하에 지배되어 갔다.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71184
알고 봤더니 젊은 친구들 사이에 카츠 하는 영향력이 높아 키워드만 검색해도 온갖 정보가 쏟아져 나왔고 이미 유행도 휩쓸고 간 것 같았다.
아이는 돈까스에, 나는 카츠하에 미쳐있던 나날이었다. 하루 종일 이어지던 아이의 수다가 끝났다.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싸 퇴근이다!!! 를 외치고 유튜브를 틀었는데, 카츠하의 발레리나시절 영상이 떠있었다. 신기해하며 "여보, 여보, 이거 카츠하 발레리나 시절 콩쿨 영상이래." 하며 태블릿을 들이밀었다. 늘 그렇듯 같이 보는 척해주던 남편은 "여보, 내가 전부터 진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하며 운을 띄웠다. 영상에 홀린 채로 대답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 이름은 카츠하가 아니라 카즈하라는걸 알려주고 싶었어. 카츠는 히레카츠 규카츠 할 때 쓰는 말이고, 저 사람은 카즈하. 굳이 비교를 하자면 김지은씨한테 김치은씨라고 하는 격이랄까."
이런..카츠하라고 여태 이야기했는데 카즈하였다니!!! 급하게 창피함이 몰려와 다른 사람한테 얘기한 적 있나 기억을 풀가동했다.
왜 이렇게 단어를 를 헷갈리는 걸까..
예전에 초밥집에서 지인이 사이드 메뉴로 '차완무시'라는 일본식 계란찜을 추천해 줘서 먹었었다. 이 계란찜 이름이 차완무시였구나.. 하면서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 후 초밥집에 남편과 함께 가서 그때 먹었던 계란찜 이야기를 하면서 이름을 말하려고 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래서 "후안무치?" 했더니 남편이 피식하면서 "차완무시." 했었다. 그때부터 한동안 내 별명이 '후안무치'였었다.
그 별명이 잊힌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다시 연돈카츠하라는 별명이 생겨버렸다. 남편이 거의 두 달을 먹은 돈까스 일본식 발음 돈카츠에 내 이름 마지막 글자가 연으로 끝나서 '연'을 붙여봤단다. 돈까스 폭격기는 개학해서 학교에 갔고 '연돈카츠하'는 여전히 집에 남아있게 되어버렸다. 흠… 등 근육은 다음에 키워야겠다.